AI가 세상을 바꾸는 시대, 인문학은 인간을 지킨다.
AI가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이미지를 그리고, 글을 쓰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는 기술의 정점에 서 있는 듯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불안하다. 기술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는 시대에, 과연 인간은 무엇으로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을까? 그때마다 내 안에서 울리는 한 목소리가 있다. “지금, 인문학이 필요하다.”
인문학은 오래된 학문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 시대를 가장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언어다. 인문학은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이며, 인간이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기술이 ‘더 빨리, 더 많이’를 추구한다면, 인문학은 ‘더 깊이, 더 바르게’를 묻는다. AI가 해답을 제시할 때, 인문학은 질문을 남긴다. 그리고 그 질문의 깊이가 바로 인간의 품격을 결정한다.
퇴계 이황이 남긴 『성학십도』는 그 대표적인 예다. 그는 군주에게 “배우라”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지식을 더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마음을 닦아라.” 그것이 진정한 배움의 시작이었다. 그의 공부는 도덕과 실천을 잇는 길이었고, 인간의 내면을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오늘의 인문학도 그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를 알지만, 정작 그 정보가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인문학은 그 공백을 메우는 사유의 근육이다.
AI 시대에 인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기술이 할 수 없는 일을 인간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AI는 수많은 데이터를 계산하지만, 그 계산의 결과가 ‘옳은가’ ‘선한가’를 판단하지는 못한다. 기술은 수단을 제공하지만, 목적을 결정하지 못한다. 그 목적을 세우는 일은 언제나 인간의 철학, 곧 인문학의 몫이다.
그리고 인문학은 단지 기술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방패가 아니다. 오히려 그 기술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현명하게 활용하기 위한 뿌리이기도 하다. 인문학이 없는 기술은 방향을 잃고, 철학이 없는 AI는 인간의 삶을 공허하게 만든다. 기술을 비판할 줄 아는 힘도, 기술을 창의적으로 다루는 감각도 결국 인문학에서 비롯된다. 인문학은 기술의 한계를 성찰하게 하고, 동시에 그 잠재력을 인간의 선을 위해 확장시키는 토양이 된다.
또한 인문학은 우리를 다시 ‘사람’으로 만든다. 문학을 통해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역사 속에서 인간의 실수를 배우며, 철학을 통해 옳고 그름의 경계를 탐색한다. 이 모든 경험은 감정의 근육을 단련시키고, 윤리적 감수성을 확장시킨다. AI가 언어를 흉내 내더라도, 공감과 위로의 온도를 재현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문학은 또한 창의성의 뿌리이기도 하다. 기술이 ‘정답’을 찾아내는 동안, 인문학은 ‘다른 길’을 찾아낸다. 그것은 지식을 조합하는 능력이 아니라,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능력이다. 퇴계가 학문을 ‘도(道)’의 탐구로 보았듯, 인문학은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고, 기존의 틀을 넘어서는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기술은 모방할 수 있지만, 사유의 깊이와 통찰은 여전히 인간만이 가진 영역이다.
인문학은 인간 중심 문명의 조건이다. 기술이 인간의 손을 확장시킨다면, 인문학은 인간의 마음을 확장시킨다. AI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그 기술이 인간의 행복을 향하지 않는다면 진보라 할 수 없다. 인문학은 기술의 속도에 제동을 걸며, “그 길의 끝에 인간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AI 시대의 리더십은 기술의 문제를 넘어, 인간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문학은 그 질문의 뿌리를 세운다. 철학은 방향을, 문학은 감성을, 예술은 인간의 상상력을 회복시킨다. 그래서 인문학은 과거의 지식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인간의 언어이다.
AI가 세상을 바꾸는 시대, 인문학은 인간을 지킨다.
그리고 그 인간다움은 결국 ‘생각하는 마음’, ‘공감하는 마음’, ‘올바르게 선택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퇴계가 말한 ‘마음을 밝히는 공부’는 이제 기술 시대의 리더에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AI 시대에 인문학이 다시 빛을 발하는 이유이자, 기술을 넘어 인간의 시대를 지속시키는 유일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