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로 만나는 일본2: 오키나와 우루마(うるま), 나카가미(中頭)
가츠렌구스쿠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 앞에 보이는 성벽이 제4구루와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조선과 류큐국의 왕성했던 교류 역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전기 류큐국은 명나라, 일본, 여진과 더불어 4대 대외 교역국 중 하나였다.
류큐국이 교류에 훨씬 적극적이어서, 조선에 사절을 50여회나 파견했다. 하지만 11세기까지 오키나와에는 문명이 개화되질 못했다.
12세기부터 오키나와 본섬과 주변 섬에 ‘구스쿠’라는 석성이 세워지면서 본격적인 문명시대가 시작됐다. 여기서 구스쿠는 오키나와어로, 일본 본토의 일본어와 발음이 전혀 다르다.
제4구루와에서 바라본 웅장한 모습의 가츠렌구스쿠.
그러나 오키나와인들은 지금도 슈리성을 제외한 다른 주요 성을 모두 ‘~~구스쿠’라고 부른다. 2023년 3월 필자는 오키나와를 방문해 8일 동안 머무는 계획을 미리 짰다.
오키나와 주유패스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슈리성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본섬 내 주요 구스쿠를 찾기로 했다.
하루는 나하(那覇)에서 거리가 멀고 버스의 운행 횟수가 적은 현지 사정으로 인해서 오직 2개의 구스쿠만 방문할 수 있었다. 바로 우루마(うるま)시의 가츠렌구스쿠(勝連城)와 나카가미(中頭)군의 자키미구스쿠(座喜味城)이다.
계단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바라본 제3구루와의 측면.
먼저 찾은 가츠렌구스쿠는 과거에는 14세기 초에 지어졌던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까지 발굴이 지속되면서 문명시대 이전부터 살았던 석기 유물이 발견됐다.
오키나와에는 11세기 이후에야 철기가 전래하여 보급됐다. 이런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지금은 13세기 전후에 구스쿠가 축조됐다고 보고 있다.
버스를 내려서 올려다본 가츠렌구스쿠는 슈리성에 비견될 만큼 거대하고 웅장했다. 해발 약 60~98m에 층층이 지어졌고, 총 면적은 1만1897㎡에 달했다. 성벽은 산호질 석회암으로 견고하게 쌓아서 축조했다.
제1구루와에서 본 부감. 위는 제2구루와이고 아래는 제3구루와이다.
가츠렌구스쿠는 외성, 중성, 내성으로 구분했던 슈리성과 전혀 달리, 꼭대기부터 가장 밑까지 제1구루와(曲輪)에서 제4구루와로 축조했다. 구루와는 성곽을 일정 구역으로 나눈 구역이다.
산을 기댄 입지조건과 견고한 구루와 덕분에 가츠렌구스쿠는 류큐국에게 최후까지 저항했다. 마지막 성주인 아마 와리(阿麻和利, ?~1458)는 중국, 일본, 조선 등과 직접 무역하면서 힘을 키워서 류큐국에 대항했다.
이를 보여주듯, 가츠렌구스쿠에서 중국의 도자기가 대량으로 발견됐고 조선의 도자기, 일본의 기와 등도 발굴됐다.
제1구루와에서 내려다 본 성벽 위와 태평양 바다.
그러나 아마 와리의 야심은 류큐국왕인 쇼타이큐에게 꺾기고 말았고 1458년에 멸망했다. 필자는 입구부터 천천히 걸어서 올라갔다.
비록 가츠렌구스쿠가 멸망당한 뒤 버려졌지만, 워낙 견고하게 지어 쿠루와는 우아한 곡선미를 그대로 간직했다. 제3구루와부터는 돌과 나무로 만든 계단이 있어 손쉽게 오를 수 있었다.
제3 및 제2구루와에는 우물이 4개나 있어 식수 걱정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제2구루와에는 상당히 큰 건물도 지어졌다. 가장 높은 제1구루와까지 오르니 눈앞에 태평양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중앙에 쐐기돌을 끼고 2개의 돌을 맞물려서 만든 자키미구스쿠 성문.
가츠렌구스쿠를 떠나 1시간 30분 동안 버스를 한 차례 갈아타고 다시 20여분을 걸어 도착한 자키미구스쿠는 성격이 전혀 다른 성이었다. 해발 120m의 구릉에 자리 잡고 규모는 작다.
하지만 성문과 성벽에 쌓았던 돌담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은 오키나와 구스쿠 중 으뜸으로 손꼽힌다. 실제로 두 겹으로 된 성벽 가운데에 아치형 성문이 만들어져 곡선미를 한층 돋보이게 한다.
그 이유는 류큐국이 삼산(三山)시대를 종식하며 통일하는 과정인 1420년에 축조되어 기존의 구스쿠 축조기술이 집약되었기 때문이다.
내성 성벽 위에서 내려다 본 내성과 외성의 성문.
오키나와 구스쿠의 명성은 15세기에 조선에도 잘 전해졌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한때 구스쿠의 축조 기술과 경험을 수입하려고 했다.
남으로는 왜구, 북으로는 여진족의 침입을 방비하는 성을 쌓기 위해서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다만 구스쿠의 기술과 경험을 실제 도입해서 축조했다는 문헌 기록은 없기에, 단순히 참고만 한 듯싶다.
류큐국이 자키미구스쿠를 건설했던 목적은 1416년에 호쿠잔을 멸망시킨 뒤에도 오키나와 서부 해안가로 도망가서 국왕에게 대항하는 잔당 세력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내성 안에는 큰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를 위해서 류큐국은 중국, 일본, 조선 등과 교역하며 축적한 재화를 성을 쌓는데 쏟아부었다.
당시 자키미구스쿠 앞 해안가는 류큐국의 무역항인 요미탄산(読谷山)으로, 외국에서 온 무역선이 100여척이 몰려들 정도 번성했기에 가능했다. 요미탄자는 오늘날 요미탄(読谷)의 옛 이름이다.
류큐국왕은 축성으로 명성이 높았던 요미탄의 호족 안지 고사마루(按司護佐)에게 성을 쌓도록 했다. 안지 고사마루는 성벽 전체를 부드러운 곡선이 계속 맞물리는 구조로 축조했다. 성벽이 맞물리는 지점 위에는 초소를 설치했다.
자키미구스쿠는 정교한 돌담과 뛰어난 곡선미를 자랑한다.
이렇게 잘 지은 성이었기에 자키미구스쿠는 20세기에도 사용됐다. 1945년 태평양전생 시기 오키나와전투에서 일본군은 고사포 진지로 이용했다. 미군이 점령한 뒤에는 레이더기지가 설치됐다.
1972년에야 국가 지정 사적으로 지정해서 보존했다. 2000년에는 슈리성, 가츠렌구스쿠와 함께 ‘류큐왕국의 구스쿠 유적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그런데 자키미구스쿠는 다른 성과 달리 관광객이 성벽 위에 올라갈 수 있었다. 필자도 성벽 위에서 한참 머물렀는데, 눈앞에 펼쳐진 요미탄과 해안가가 멋졌다.
구스쿠가 맺어준 인연을 맺게 해준 히카주조. ⓒ 히카주조 SNS
자키미구스쿠에서 나와 걸어서 버스 정거장을 갔다. 버스를 기다리던 중 정거장 옆 술판매장에서 요미탄에 소재한 히카주조(比嘉酒造)에서 제조한 파란색 병의 ‘아와모리(泡盛)’ 1병을 샀다.
저녁에 호텔로 돌아와 아와모리를 처음 마셨다. 전날 즈이센주조에서 산 오모로(おもろ) 15년 2병은 귀국 후에 마시려고 모셔두기만 했다.
히카주조의 프리미엄 잔파(Zanpa)는 30도의 높은 도수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깔끔하면서도 강렬한 맛이었다. 아주 개성이 있어 홈페이지에 들어가 정보를 살펴봤다.
즈이센주조 내에 있는 아와모리 숙성고.
아와모리는 류큐국 통치기부터 빚기 시작했고, 증류한 술을 부을 때 거품이 솟아올라 이름을 짓게 됐다고 한다. 일본 본토의 전통주인 니혼슈와 다른 점은 흑국(黑麴)이라는 독특한 누룩을 사용한다.
검은 흑국균은 미생물의 성장을 억제하나 세균의 오염은 막을 수 있다. 이는 덥고 습한 오키나와의 기후환경을 고려한 조치다.
따라서 증류한 술을 큰 항아리에 담아 오랫동안 숙성시켜야 미생물이 성장한다. 오키나와에서는 3년 이상을 숙성시키고 도수가 40도인 아와모리를 ‘쿠스(古酒)’라고 부른다.
필자가 오키나와 나하에서 사와 귀국해서 마신 오모로(おもろ) 15년.
그렇기에 필자가 즈이센주조에서 구입한 술은 오모로라는 브랜드에 15년을 숙성시킨 쿠스라는 뜻이 된다. 쿠스의 가격은 다른 아와모리보다 훨씬 비싸다.
오모로는 10년이 3060엔, 15년은 6400엔, 18년이 1만1000엔, 21년은 1만4850엔으로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뛰어오른다. 왜냐하면 오래 숙성시킬수록 맛과 향이 깊어지고 풍부하기 때문이다.
숙성 과정에서 증발되는 양에 다른 아와모리를 더하는 블렌딩도 2~4회 한다. 이렇게 오랜 시간과 많은 공을 들이면서 보관과 관리를 하기에 비쌀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