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최고 관광지가 품은 '아와모리'

술로 만나는 일본3: 오키나와 나키진(今歸仁), 나고(名護)

by 모종혁

오키나와국제해양박람회에서 해양생물관이었던 추라우미 수족관.


오키나와를 방문하면 반드시 찾는 관광지가 있으니, 해양박람회기념공원(海洋博公園)이다. 해양박람회기념공원은 1975년 7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열린 오키나와 국제해양박람회의 부지를 기념해 조성했다.


국제해양박람회는 1972년 오키나와가 태평양전쟁 이후 미군의 통치 아래 있다가 일본으로 반환된 기념사업으로 추진되어 개최됐다.


당시 일본정부는 특별법까지 제정하여 바다를 주제로 한 엑스포를 계획했다. 그 결과 국제해양박람회는 성공적으로 진행됐고, 폐막 후에는 지금의 공원으로 유지했다.


해변 바다색과 먼 바다색이 다른 해양박람회기념공원 내 에메랄드 비치.


일본에 반환되긴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오키나와에서는 류큐국처럼 독립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1945년 4월 오키나와전투에서 일본군이 오키나와 주민을 방패로 삼아 미군을 상대로 소모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오키나와전투에서 민간인 12만 명이 희생됐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부흥한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을 기점으로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따라서 미군정 통치 아래 미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무국적자이었던 오키나와 주민은 본토 복귀운동을 펼치게 됐다.


추라우미 수족관은 고래상어가 노니는 대형 수조를 갖추었다.


국제해양박람회는 이런 과정을 거쳐 일본으로 반환된 오키나와를 위해서 일본정부가 공들여 마련했다.


실제로 해양박람회기념공원에는 일본 최대 규모인 추라우미 수족관(美ら海水族館)뿐만 아니라 돌고래극장, 트로피컬 드림센터, 오키나와 향토마을, 에메랄드 비치 등까지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풍부하다.


엑스포에서 해양생물관을 리모델링하여 재개장한 추라우미 수족관은 몸길이가 6m가 넘는 고래상어가 있을 정도다. 고래상어가 노니는 대형 수조는 원형 극장처럼 여러 각도의 관람공간에서 감상할 수 있다.


돌고래극장에서는 날마다 여러 차례 돌고래쇼가 열린다.


돌고래극장에서는 날마다 여러 차례 쇼가 열린다. 최근 돌고래쇼를 줄이거나 금지하는 전 세계적인 흐름과 달리, 일본은 여전히 돌고래를 포획하고 학살하는 나라다.


트로피컬 드림센터는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애니메이션영화 《천공의 성 라퓨타(天空の城ラピュタ)》 속 라퓨타를 현실화한 곳이다. 물론 지적재산권 문제로 트로피컬 드림센터는 이를 부정한다.


하지만 문명의 이기를 버리고 오직 꽃과 나무, 숲의 정원이 된 라퓨타와 너무나 흡사하다. 경내의 탑 정상에서는 주변 전경을 조망할 수 있다.


《천공의 성 라퓨타》를 연상케 하는 트로피컬 드림센터.


외국 관광객은 이런 코스로 해양박람회기념공원을 반나절 동안 구경한 뒤 떠나지만, 주변에는 오키나와 주민이 반드시 찾는 곳이 또 있다. 자동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나키진구스쿠(今歸仁城)다.


나키진구스쿠가 ‘류큐왕국의 구스쿠 유적지’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지만, 류큐국 이전 삼산시대에서 호쿠잔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키나와를 방문하기 전 마지막 구스쿠 방문지로 선택했다. 가족, 연인, 단체로 왔던 다른 관광객과 달리 버스를 타고 이동해 정거장에서 걸어갔다.


나키진구스쿠 우시미 앞에 서 있는 세계문화유산 표지석.


나키진구스쿠는 13세기부터 해발 100m에 성을 쌓았다. 그러다가 14세기 초 호쿠잔이 오키나와 북부를 지배하면서 도성(都城)으로 발돋움했다.


중국 사서에 따르면, 14세기 호쿠잔은 하니지(帕尼芝), 민(珉), 한안치(攀安和) 3왕이 통치하며 중국과 교역으로 번성했다. 당시 호쿠잔의 통치 영역은 난잔과 주잔보다 더 커서 오키나와에서 가장 넓었다.


주잔왕에게서 정권을 탈취한 쇼하시가 대외무역으로 힘을 기른 뒤 1416년 호쿠잔을 쳐들어갔다. 호쿠잔은 저항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멸망당했다.


나키진구스쿠의 성벽 우시미(大隅).


주목할 점은 다른 도성과 달리 류큐국이 나키진구스쿠를 그대로 유지했다. 오키나와 북부를 관리하기 위해서 간슈(堅守)를 두고 다스렸기 때문이다. 또한 혹시나 모를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는 측면이 강했다.


이런 우려는 현실이 됐다. 1608년에 사쓰마번(薩摩藩)이 류큐국에 사신을 보내어 에도막부에 조공할 것을 요구했다.


류큐국이 이를 거절하자, 이듬해 3000여명의 병사를 보내서 류큐국을 공격했다. 3월 말 오키나와 본섬에 도착한 사쓰마 군대는 3일 만에 나키진구스쿠를 공략해 단숨에 함락했다.


나키진구스쿠의 위에서 내려다 본 우시미와 바닷가.


나키진구스쿠는 산세를 타면서 성벽을 층층이 쌓았다. 사람이 오가는 앞쪽은 가이카쿠(外郭)와 우시미(大隅)라는 두 겹의 성벽을 견고히 쌓았다.


그 밖의 성벽은 험준한 절벽이거나 깊은 계곡인 가자후(カーザフ)를 기대어 쌓았다. 하지만 오랜 전국시대와 7년 임진왜란으로 단련되고,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사쓰마번 군대를 막아낼 수 없었다.


사쓰마번 군대는 류큐국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 나키진구스쿠를 방화하고 파괴했다. 그런 뒤 밀고 내려가 우라소에구스쿠를 함락시키고 슈리성으로 쳐들어갔다.


사쓰마번 군대의 방화와 파괴로 지금은 집터만 남았다.


사쓰마번 군대의 침략 이후 나키진구스쿠는 재건되지 못했다. 간슈도 다시 거주하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는 총연장이 1500m에 달하는 성벽을 제외하고 호쿠잔 시기에 지어진 건물은 전혀 없다.


그러나 슈카쿠(主郭)가 있던 자리에는 불의 신을 모시는 사당이 세워져, 지금까지 오키나와 주민이 찾아와 참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1월 중순부터 2월 초까지는 칸히자쿠라(寒緋櫻)가 나키진구스쿠 곳곳에 활짝 피어 관광객이 몰려온다. 칸히자쿠라는 붉은 꽃의 벚나무다. 따라서 오키나와 주민에게 의미가 크다.


나고 시내에 소재한 아와모리 양조장 쓰카야마주조.


오늘날 해양박람회기념공원과 나키진구스쿠는 행정구역상으로는 쿠니가미군(國頭郡)에 속해 있다. 하지만 군 소재지가 상당히 멀고, 중간에 나고(名護)시가 끼어 있다.


나고는 오키나와의 2대 도시로, 인구가 6만여 명에 달한다. 본래 나고는 쿠니가미군에 속해 있었다가, 인구가 늘어나 시로 승격했다.


그렇기에 해양박람회기념공원과 나키진구스쿠에서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나고에 거주하고 있다. 나고 시내에서 버스로 50분이면 두 곳을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나고에 쓰카야마주조(津嘉山酒造)가 있다.


쓰카야마주조의 아와모리 양조시설.


쓰카야마주조는 1925년에 양조장을 창업하여 1931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당시만 해도 목조 건물로는 나고에서 가장 컸다. 오키나와전투로 인해 나고의 대부분 건물은 파괴됐지만, 양조장은 건재했다.


전후에는 한동안 미군에게 징발되어 빵공장으로 사용됐다. 이런 역사를 가진 덕분에 오키나와현정부로부터 유형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필자가 쓰카야마주조를 찾아갔을 때 정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사장의 아버지가 계셨다. 영어를 전혀 못 하셔서 모바일 번역기로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쓰카야마주조의 주력 상품은 도수가 43도로 높았으나 맛은 부드러웠다.


사장 아버지는 외국인이 처음 방문했다며 기뻐했다. 그리고 필자를 안내하며 아와모리의 제조과정을 소개했다. 아와모리는 인디카종인 태국 쌀을 원료로 쓴다.


쌀을 물에 담가 수분을 함유케 하고 40~50분을 쪄서 40캜가 됐을 때 흑국균을 더해서 누룩을 육성시킨다. 이를 물이 있는 탱크에 넣고 효모를 더해서, 2주 동안 발효시킨다.


이렇게 숙성된 것을 증류기에 넣어 2~3시간 동안 가열하여 아와모리를 뽑아낸다. 그리고 3년 이상 숙성시켜야 깊은 맛과 부드러운 풍미를 지닌 ‘쿠스’가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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