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개척 역사와 함께 한 '삿포로맥주'

술로 만나는 일본4: 홋카이도 삿포로(札幌)

by 모종혁

삿포로를 방문한 이라면 반드시 가야 할 삿포로맥주박물관.


2023년 4월 하순 필자는 일본 4대 섬 중 3번째로 홋카이도(北海道)를 갔다. 나고야에서 일본 국내선 여객기를 타고 1시간 35분을 비행하여 신치토세(新千歲)공항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런데 홋카이도에서 영하의 추운 기온과 눈이 내리는 날씨를 경험했다. 필자는 중국에서 이 같은 일을 여러 차례 겪었다.


2012년 3월이 특별났다. 기온이 30도였던 하이난다오(海南島)부터 시작해서 상하이(上海), 저우산(舟山), 칭다오(青島), 베이징(北京)을 취재했다. 마지막으로 찾은 간쑤(甘肅)성에서는 눈이 내렸다.


2023년 상반기 현재 보수공사 중인 홋카이도 옛 도청 건물.


드넓은 대륙인 중국과 달리, 일본은 크지 않은 섬나라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홋카이도에 가서야 3월 중순에 방문했던 오키나와와 비교되면서 일본이 얼마나 큰지 실감했다.


주목할 점은 삿포로(札幌)를 첫날에 잠시 거쳐 갔을 뿐 마지막 일정으로 방문해 구경했다. 삿포로는 인구 522만 명의 홋카이도에서 40%에 가까운 195만 명이 살고 있다.


이는 일본 기초자치단체인 시정촌(市町村) 가운데 4위에 해당하고, 도쿄 이북의 도시 중 가장 많다. 따라서 일본 최북단에 있는 정령(政令)지정도시다.


1878년 삿포로농학교의 군사훈련장으로 지은 삿포로 도케이다(時計臺).


정령지정도시는 일본 지방자치법에서 정한 인구 50만 명 이상의 대도시를 가리킨다. 현재 정령지정도시는 20개가 있는데, 대부분 혼슈에 몰려 있다. 규슈에는 3개 밖에 없고, 시코쿠에는 아예 없다.


홋카이도에는 삿포로가 유일하다. 정령지정도시로 되면 일본에서 광역자치단체인 도도부현(都道府縣)의 권한을 많이 위임받는다.


또한 삿포로는 홋카이도청 소재지이면서 행정구역상으로는 이시카리진흥국(石狩振興過)에 속한다. 진흥국은 현재 일본에서 홋카이도만 남아있는 독특한 행정체계이다.


삿포로맥주의 전신인 삿포로개척사맥주주조소(開拓使麥酒釀造所).


모두 14개가 있는데, 그 중 면적 규모가 큰 9개를 종합진흥국이라고 부른다. 흥미로운 점은 인구가 이시카리진흥국이 가장 많지만, 종합진흥국은 아니다.


따라서 일부 광역 행정업무는 소라치(空知)종합진흥국이 관할한다. 삿포로와 관련된 행정체계가 이렇게 복잡한 이유는 일본이 홋카이도를 에도시대부터 영토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정복하고 사할린과 쿠릴 열도에 진출하면서 에도막부는 홋카이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주목했다. 따라서 19세기 초 측량조사를 벌였다.


삿포로개척사맥주주조소 본관의 측면.


그리고 1855년 에도막부는 전국시대 이래 홋카이도 남단에서 살았던 마츠마에(松前) 가문의 영지 대부분을 직할령으로 삼았다.


이에 대한 보상을 지급했으나, 주요 경작지를 뺏긴 마츠마에번(藩)의 불만은 컸다. 따라서 마츠마에번군은 에도막부군과 여러 차례나 충돌했다.


1869년 메이지천황이 판적봉환을 단행하면서 본격적으로 홋카이도라는 명칭을 쓰게 됐다. 본래 일본에서 도(道)라는 행정체계는 8세기 율령제가 실시되었을 때부터 사용되어, 10세기 헤이안시대에 들어서 확립했다.


삿포로개척사맥주주조소에서 사용되는 맥주 원액 증류기.


헤이안시대에는 ‘고키시치도’라고 해서, 60여개의 국(國)과 주(州)를 크게 5개의 키(畿)와 7개의 도(道)로 구분했다.


메이지정부는 이런 율령제 체계에서 혼슈, 규슈, 시코쿠와 전혀 다른 새로운 북방 영토로 홋카이도를 설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삿포르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홋카이도개척사(開拓使)를 설치했다.


비록 1871년 메이지정부가 폐번치현을 단행했지만, 홋카이도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했다. 율령체계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지는 않았으나, 도도부현으로 대체되면서 유명무실화됐다.


삿포로맥주박물관 본관 앞에 전시된 증류기.


이런 과정에서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니,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清隆, 1840~1900)이다. 기요타카는 1870년에 홋카이도개척사의 개척차관으로 임명됐다.


홋카이도를 어떻게 개발할지 찾기 위해서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기요타카는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서는 일본인의 대량 이주가 절실하다고 느꼈다.


이를 위해서 이주하는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야 했기에, 미국의 서부 개척 노하우와 기술을 전수받고자 했다. 따라서 미국 전문가를 홋카이도로 초청하여 컨설팅을 받고 지식을 전수받았다.


삿포로맥주박물관 본관에 전시된 거대한 혼합기.


미국 전문가는 홋카이도에서 미국식으로 기계를 이용한 밭농사와 축산업이 적당하다고 조언했다. 또한 개척을 추진하는 인재의 양성을 역설했다.


그에 따라 1872년 기요타카는 도쿄에 개척사임시학교를 설립하여 학생을 모집했다. 졸업 후에는 의무적으로 홋카이도 개척에 종사토록 했다. 1875년에는 학교를 삿포로로 옮겼다.


이듬해에는 일본 최초로 학사 학위를 수여하는 삿포로농학교로 확대해서 개편하는데, 오늘날 홋카이도대학의 전신이다. 이런 과정에서 한 미국 전문가가 홋카이도에서 야생 홉을 발견했다.


1876년 개척사맥주양조소 창립식 때 찍은 기념사진.


홉은 혹독한 영하 기온에서도 잘 자라는 내한성(耐寒性) 식물로, 춥고 척박한 홋카이도에서 재배하기 적합했다. 그래서 미국 전문가는 야생종을 개량하여 대규모로 경작할 것을 권장했다.


이런 판단은 향후 일본에서도 서구처럼 맥주를 마실 것으로 전망해서 홋카이도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홉은 맥주에서 독특한 쓴맛과 향기를 만들고, 잡균으로 인한 산화를 방지하는 필수 원료다. 전 세계 맥주가 각기 다른 향을 가진 이유는 나라마다, 지방마다 생산되는 홉의 꽃향기가 다른 조건에서 비롯됐다.


삿포로에 개척사맥주양조소를 건설했던 무라하시 히사나리의 소개.


이렇게 홉을 생산하면서 1876년 개척사는 삿포로에 일본 최초의 맥주 양조장인 개척사맥주양조소(麥酒釀造所)를 설립했다. 사실 처음에는 개척사의 농업시험장이 있던 도쿄에서 맥주를 생산하려고 했다.


하지만 건설 책임자였던 무라하시 히사나리(村橋久成, 1842~1892)가 반대했다. 히사나리는 개척사에서 근무하며 삿포로 건설을 위해서 토지를 측량하고 도로와 가옥을 만드는데 종사했다.


그렇기에 삿포로에 대한 애정이 많았다. 또한 도쿄는 맥주 생산을 위한 기반 환경이 부적합하다고 여겨 건의서를 제출했다.


1877년부터 1883년까지 사용하였던 삿포로맥주병.


히사나리는 “홋카이도는 양조장을 건설하기 위한 목재가 풍부하고 맥주를 저온에서 발효시키고 이송하는 데 필요한 얼음이 많다”면서 “삿포로는 편리한 운송로도 갖추어져 맥주를 혼슈로 보내서 판매하는데 이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기요타카도 독일을 견학하고 온 관리의 의견을 들었던 터라, 홉과 보리의 생산지인 홋카이도로 최종 낙점지었다.


마침 독일의 베를린맥주양조회사에서 맥주 양조기술을 배우고 귀국했던 나카가와 세이베이(中川清兵衛)가 참여하면서 개척사맥주양조소는 순조롭게 문을 열었다.


삿포로맥주박물관 시음장에서 직원들이 뽑아내는 삿포로 생맥주.


1877년 일본 최초의 맥주인 냉제(冷製) 삿포로맥주가 출시됐다. 냉제는 품질 유지를 위해서 맥주를 얼음과 함께 이송하였기 때문에 붙여졌다.


삿포로맥주의 병 라벨에는 북극성을 그렸는데, 홋카이도개척사의 문양에서 따온 것이다. 이것을 훗날 보리 위의 북극성으로 조정해서 ‘아카(赤)’라는 애칭이 붙었다.


삿포로맥주는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맥주를 맛본 일본인을 중심으로 차츰 대중화됐다. 1887년에는 오쿠라(大倉)가 개척사맥주양조소를 양도받아 민영화하면서, 지금의 삿포로맥주회사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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