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왕국 슈리성 지하수로 빚는 '아와모리'

술로 만나는 일본1: 오키나와 나하(那覇)

by 모종혁

슈리성의 정문 격인 슈레이몬(守禮門).


1456년 정월 25일 수군인 양성 등이 제주에서 출발해 제주도 앞바다를 누비며 순찰에 나섰다. 그러다 2월 2일 거센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여 류큐국(琉球國)의 한 섬에 이르렀다.


섬 안에는 석성(石城)이 있어 도주가 혼자 거주했고, 성 밖에는 주민이 사는 촌락이 있었다. 양성 등은 섬에 머문 지 한 달만에 배를 타고 류큐국왕이 사는 본섬으로 갔다.


류큐국 본섬에 도착한 양성 등은 왕도에서 5리 밖 공관에 거주했다. 공관 앞 토성에는 류큐국 백성과 조선, 중국 등에서 온 사람이 모여 100여가구가 살고 있었다.


슈리성의 외성 문인 칸카이몬(歡會門).


한 달이 다시 지난 뒤 양성 등은 왕성으로 갔다. 왕성은 3겹으로 되어 있었다. 외성(外城)에는 창고와 마구간이 있었고, 중성(中城)에는 시위군 200여명이 상주했다.


내성(內城)에는 3층과 2층의 전각으로 있었다. 내성의 정전은 경복궁 근정전과 비슷했다. 류큐국왕은 길일(吉日)을 택해 왕래하며 정전에 거주했다.


정전은 판자로 지붕을 덮었고 판자 위에는 납을 진하게 칠해놓았다. 3층에는 진귀한 보물을 간수해 놓았고, 1층에는 곡식과 술을 저장했다. 류큐국왕은 2층에 거주했는데 시녀가 100여명이나 있었다.


슈리성의 중성 문인 즈이센몬(瑞泉門).


이 기록은 조선왕조의 《세조실록》 27권에 세조 8년인 1462년 2월 16일에 일어난 일로 실렸다. 양성 등이 오늘날 일본 오키나와(沖繩)인 류큐국에서 귀환한 뒤 정부에 보고한 내용이다.


이 밖에도 류큐국왕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다. 국왕은 나이가 33세였다. 아들이 4명이 있었는데, 큰아들은 15살로 보였고 나머지는 모두 어렸다.


이를 통해 국왕은 1415년에 태어나서 1454년에 왕위에 오른 쇼타이큐(尙泰久, 1415~1460)로 추정된다. 쇼타이큐는 통일된 류큐국의 쇼(尙)씨 제1왕조 6대 왕이었다.


즈이센몬 돌계단 옆에 있는 우물. 여기서 즈이센주조 이름이 나왔다.


류큐국왕은 평소 왕궁 남쪽에 있는 옛 궁궐에 거주했다. 그러다가 길일에 왕성 안 정전에 2~3일씩 혹은 4~5일씩 머물렀다. 정전에 있을 때는 중국식 왕관을 썼고 평소에는 흑초를 사용해 머리를 싸맸다.


5일마다 한 번씩 정전에서 조회(朝會)했는데, 좌우에 큰 깃발을 세웠다. 신하는 정전 앞의 마당에 늘어서서 왕을 향해 합장하여 3번을 절하였다.


또한 백성은 큰 통을 가지고 와서 왕궁에 술과 생모시를 바쳤다. 관료와 백성의 옷은 모두 왜복(倭服)과 비슷했고 바지는 없었다. 옷은 비단이나 모시로 만들었다.


중성 위에서 내려다 본 칸카이몬과 큐케이몬(久慶門).


조선시대 바다에서 표류하다 류큐국까지 이른 조선인은 양성 등만이 아니었다. 1462년 정월에 전라도 나주에서 출발한 초득성 등 어민 8명이 표류하다 2월 초 류큐국에 이르렀다.


초득성 등은 4월 말 본도로 건너가 국왕을 알현하고 후한 접대를 받아서 7월에 되돌아왔다. 《세조실록》에는 류큐국에 관한 기록이 64건이 있고 《조선왕조실록》 전체에는 419건이 있다.


당시 조선과 류큐의 교류가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조선왕조실록》에는 류큐국 왕성인 슈리성(首里城)에 대한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


내성의 문인 호신몬(風神門). 중앙의 문은 왕과 귀족만 다녔다.


슈리성은 14세기 후반에 축성됐다. 하지만 처음부터 류큐국의 수도는 아니었다. 본래 류큐에는 12세기부터 각 성마다 성주가 군웅할거를 했다. 이를 ‘구스쿠(城)시대’라고 불렀고, 13세기까지 지속됐다.


그러다가 지역별로 난잔(南山), 주잔(中山), 호쿠잔(北山)의 세 왕국으로 정리됐다. 큐류판 삼국시대에 슈리가 있던 주잔의 왕성은 우라소에(浦添)였다.


우라소에구스쿠는 13세기부터 주잔 왕이 살며 100여년 동안 번성했다. 오늘날 우라소에구스쿠는 역대 주잔 왕들의 무덤이 남아있다. 우리에게는 영화로 친숙하다.


2019년 복원했으나 10개월 만에 화재로 불탄 정전. ⓒ 슈리성공원 SNS


바로 2016년 멜 깁슨이 연출한 《핵소 고지(Hacksaw Ridge)》다. 《핵소 고지》는 태평양전쟁에서 의무병으로 입대한 데스몬드 도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데스몬드 도스는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신자였기에 집총을 거부한 양심적인 병역거부자였다. 하지만 전쟁에 참전하여 미국인으로써 의무를 다하고자 했다. 그래서 선택한 병과가 의무병이었다.


《핵소 고지》는 이런 과정과 함께 1945년 5월 미군과 일본군 사이 벌어졌던 오키나와전투 중 우라소에구스쿠에서 일어난 처절한 전투를 생생하게 그렸다.


영화 《핵소 고지》의 무대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우라소에성.


이렇게 우라소에구스쿠에서 발전했던 주잔은 1406년에 쇼하시(尙巴志, 1372~1439)에게 멸망당했다.


주잔왕 부네이(武寧)가 실정을 거듭하자, 신하였던 쇼하시가 왕위를 찬탈하고 아버지인 쇼시쇼(尙思紹, 1354~1421)를 옹립했던 것이다. 그리고 슈리성으로 천도했다. 쇼하시는 호쿠잔과 난잔을 차례로 병합해서 1429년에 통일을 달성했다.


이때부터가 류큐국의 시작이다. 양성 등이 만난 쇼타이큐는 2대 왕이었던 쇼하시의 일곱 번째 아들이다. 이들 쇼씨 왕조의 역대 왕와 왕비는 타마우돈(玉陵)에 안장되어 있다.


쇼씨 왕조 왕과 왕비의 유골함이 안치되어 있는 타마우돈.


타마우돈은 1501년에 축조된 이후 역대 류큐국 왕족의 무덤으로 줄곧 사용됐다. 류큐국에서는 불교의 영향에 따라 화장(火葬)이 성행했다.


왕과 왕비도 사후에는 화장되어 도자기나 항아리로 만든 유골함에 안치됐다. 타마우돈에는 지금도 약 70여명의 왕과 왕비, 왕자의 유골함이 남아있다. 다만 타마우돈을 건설한 이들은 쇼씨 제2왕조다.


쇼타이큐 사후 왕족 간의 왕위 쟁탈전이 격렬해지자, 신하인 가나마루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쇼엔(尙圓)으로 바꾸고 1469년에 쇼씨 제2왕조를 창건했다.


나하(那覇)에 남아있는 오키나와 주둔 일본 해군사령부의 지하 벙커.


슈리성 왕궁은 1453년, 1660년, 1709년 화재로 폐허가 됐다가 중건하길 반복했다. 그러다가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군은 미군과의 결전을 위해 슈리성 지하에 사령부 벙커를 건설했다.


지하 벙커에는 고위 장교를 위한 게이샤(藝者)와 창녀 20여명까지 수용할 정도로 거대했다. 그러나 오키나와전투에서 미군의 포격이 심해지자, 일본군은 슈리성을 버리고 남부로 퇴각했다.


그 와중에 슈리성과 왕궁은 잿더미가 되었다. 이를 슈리성공원으로 지정해 1992년부터 복원하여 2019년 1월에 정전을 마지막으로 완공됐다.


슈리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즈이센주조 건물의 외경.


그러나 2019년 10월에 일어난 화재로 인해 정전은 다시 불타버렸다. 내가 찾았던 2023년 3월에 정전은 다시 복원공사에 들어간 상태였다.


슈리성과 타마우돈은 다른 유적과 함께 ‘류큐왕국의 구스쿠 유적과 관련 유산’으로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슈리성에서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독립왕국으로 번성했던 류큐국의 전통이 담긴 증류주 ‘아와모리(泡盛)’를 빚는 양조장 즈이센주조(瑞泉酒造)가 있다. 즈이센주조는 1887년에 창업하여 벌써 130여년의 역사를 가진 오키나와의 대표적인 술회사다.


다양한 아와모리를 전시 중인 즈이센주조 판매장. 시음도 할 수 있다.


즈이센주조가 빚는 아와모리는 슈리성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물을 사용한다. 이 맑은 지하수는 류큐국 시대부터 왕궁에서 사용할 만큼 물맛이 좋았다.


따라서 즈이센주조의 창립자는 슈리성의 중성 문인 즈이센몬 돌계단 옆에 있는 우물의 이름을 따와서 회사 이름을 지었다.


이렇게 슈리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좋은 물을 사용해서 제조하는 즈이센주조의 아와모리는 오키나와에서 넘버원으로 손꼽힌다. 그동안 일본 유수의 주류 콩쿠르에서 즈이센주조의 술이 수상했던 상은 너무 많아 셀 수가 없을 정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