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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잘한기쁨 Jan 17. 2021

마음이 버려졌다.

유는 유치원 하원 차량에 있는 몇 안 되는 계단을 터덜터덜 내렸다.

평소와 같은 모습이지만, 뭔가 불편해 보였다.


"재밌게 놀았어?"

그러자 유는 "엄마 잠깐만" 하며 길에서 가방을 열더니 그림 하나를 꺼내 주었다.

귀여운 아기 상어 얼굴을 펼치면 사나운 입속이 보이는 오픈카드였다.


"우와. 진짜 꼼꼼히 그렸다~귀여워"


근데 유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엄마 이거 내가 그림 그리는 시간에 선생님 주려고 진짜 열심히 그렸거든. 그래서 선생님한테 선물로 줬어.. 근데 이게 재활용 종이 버리는 통에 들어 있어서 내가 다시 주워 왔어."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우리 유 너무 속상했겠다."


"응 서운하고 속상했어. 근데 이거 엄마 가져. 나는 이제 필요 없거든"


고사리 같은 손으로 꼼꼼히 그리고 색칠해서 나름의 마음을 전했는데 버려졌다. 또 그걸 주워온 아이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니 유의 이런 모습이 어쩌면 당연했다.

유는 '나 상처 받았어요'를 눈빛, 말투, 행동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다독여주고 싶었다.

"진짜 엄마가 가져도 돼? 그래도 유가 가져와서 예쁜 그림도 볼 수 있고 엄마가 가질 수 있어서 좋다"


"응 엄마 가져."


"근데 있잖아. 엄마 생각에는 선생님이 실수로 떨어트렸을 수도 있을 거 같아.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잖아'


"응. 엄마 큰 쓰레기통에 버려지기 전에 주워와서 다행이야. 이제 이거는 엄마꺼니까 엄마가 가져도 돼"


섭섭한 표정과 섭섭한 말투를 감추지 못하는 유는 뒤돌아 걸어갔다.

나는 그런 유의 뒷모습을 보는데 괜히 마음이 울컥했다.


사실 아이들이 그림은 입장에 따라 조잡하고 장황하고 또 쓰레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나도 때때로 아이들이 만들어 오는 미술작품이 예쁜 쓰레기라는 생각될 때도 있어 아이들이 잊어버릴 때쯤 버리곤 했으니까.

그러니까 버리는 거 자체가 나는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버려도 좋으니 아이들이 보지 않았을 때,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 혹은 유치원이 아닌 곳에서 정리를 했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버려진 걸 꺼냈을 유의 마음이나, 그 모습을 보았을 원 친구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서늘했다.

그러다 정말 아이의 그림이 버려진 건지 실수로 떨어트린 건지 궁금했다.

실수라고 하기엔 그곳은 실수로 떨어뜨리는 곳이 아니라는 아이의 표현이 너무 구체적이라 엄마도 상처를 받는 건 마찬가지였다.


옷걸이가 부러졌을 때 물어내라고 했던 선생님은,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편지는 유에게만 보내지 않았고, 유가 선물한 그림을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생각하니 그냥이라고 넘기기엔 내 새끼가 이렇게 미운털이 박힌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결국 나는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다름이 아니라 유가 선물한 그림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걸 꺼내왔어요. 힘들게 그렸는데 버려져서 속상하고 서운하다고 하네요. 어떻게 된 일인가 해서 전화드렸어요."


"무슨 그림이요?"


"아기 상어가 입을 벌리면 입 속이 보이는 입체카드 같은 그림 말이에요"

내가 어떤 그림인지 설명을 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몹시 안 좋아지고 있었다.


"아 그 그림이요? 어머니 제가 갖고 있어요"


"유가 쓰레기통에서 꺼내왔는데요."


"어머니 오해예요. 제가 확인해볼게요."


"확인하지 않으셔도 돼요. 지금 제가 가지고 있어요.. 선생님이 기뻐할 모습을 생각하면서 만들었는데 버려져서 속상하고 서운하다고 해서 전 어떻게 된 일인가 궁금했네요."

나는 말을 이어가면서 유가 했을 행동들이 머릿속에 그려져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냉정하고 이성적이게 말하고 싶었는데 이미 나는 유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는 순간 이미 감정적으로 무너져 버린 거였다.


"어머니 떨어져서 들어간 거 같아요. 그 그림 가방 속에 넣어 보내주시면 제가 잘 설명할게요."


무얼 설명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상처 받은 아이의 마음을 풀어주고 싶었다. 내가 설득을 해보려 해도 유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러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고, 유가 평소 열지 않는 가방 앞주머니에 그림을 넣어두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유는 유치원 가방을 정리하다가 가방 속에 있는 그림을 꺼내 내게 내밀며 말했다.


"엄마 이거 이제 엄마 거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엄마 가져."


"근데 생각해보니까 선생님이 실수로 떨어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


"엄마. 그런 거 아니야. 거기는 그렇게 하는 데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엄마 가져"

이제 막 일곱 살이 된 아이의 표정과 말투가 아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마음이 저릿해졌다.


"응 그럴게 고마워. 우리 유치원 버스 타러 가자. 준비 다 됐지?"


"엄마 나 유치원 안 갈래. 안 가고 싶어 졌어."


"가야지 유치원을 가는 건 선생님과의 약속이잖아. 이유 없이 안 가는 건 안되지."


"그냥 안 가고 싶어."


이유 없이 유치원에 안 가고 싶다고 하면 유치원에 직접 가서 선생님께 안 가고 싶은 이유를 말씀드리고 가지 말라고 했었다. 유치원은 가고 싶다고 가고, 안 가고 싶다고 안 가는 곳이 아니라고 해왔고 그래서 '그냥'은 결석의 이유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가방 속에서 그림을 꺼내던 유는 유치원을 안 가겠다고 했다. 마음이 여리고 감정표현에 섬세한 유는 아무래도 상처가 됐던 모양이었다. 저릿했던 아침이 결국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싶었다.

덩달아 온이도 가지 않겠다 해서 결국 하루를 쉬었다.


몇 번의 서운한 일들이 포개지고, 몇 번의 일들이 쌓이는 동안 내가 철저하게 믿어왔던 것들이 흔들렸다.

그래서 유치원을 가지 않겠다는 아이 등을 억지로 떠밀고 싶지도 않았다. 원을 옮길까 하는 생각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그동안 원을 믿으며 보내왔던 시간들 그리고 지금도 즐겁다는 온이까지 그만두게 하는 건 방법이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 새 학기가 될 때까지 보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처음엔 그저 별일 아닌 일이라 생각했던 것들을 그간 일을 미루어 보면 별일 일 수도 있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오후가 되자 담임 선생님이 전화가 왔다.

"어머니 오늘 온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안 와서 전화드렸어요"


"유가 안 가고 싶다고 해서 안 보냈어요."


"선생님이 실수로 떨어트렸을 거라고 했지만 유는 아니라고 그런 거 아니라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가지 않겠다고 해서 안 보냈어요. 유가 안 가겠다고 하면 당분간 보내지 말까 생각 중이에요."

나는 말을 이어가면서 감정이 흔들렸고 결국 또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아. 제가 유한테 사과를 하고 싶은데.. 어머님 집 우편함에 편지를 넣고 가도 될까요?"


"선생님 생각에 그게 제일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세요?"


"유를 만나서 사과를 하고 안아주면 사실 제일 좋죠.."


"그러면 그렇게 해주세요. 제 생각에도 아이한테 편지를 전달해주고 읽어주면서 선생님 마음이 이렇다는데 우리 그만 이해해주자. 이렇게 말하는 건 어른이 아이한테 기대하는 방법이 아닌 거 같네요."


"그럼 제가 댁으로 가도 될까요?"


"네 전 괜찮아요 선생님 시간 되실 때 오시면 될 거 같아요."


이런 일로 누가 찾아오는 것도 싫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닌 내 감정일 뿐 아이 마음을 풀어줄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 역시 아이 마음을 풀어주러 오는 일이 얼마나 불편하고 또 그 걸음이 얼마나 어려울지 짐작도 되었다. 

그래서 어쩌면 선생님은 그 순간이 벌 받는 기분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끼리도 사이가 머쓱해지면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래서 그 관계를 회복하기보다 덮어두거나 모른척할 때 많다. 그 편이 훨씬 쉬우니까.. 그런데 아이 마음을 모른 척하지 않고 애쓰는 모습을 보고 화났던 감정은 어느새 누그러졌다.


나는 유에게 선생님이 오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몰랐던 것처럼 연기 아닌 연기를 했다.

유는 선생님 얼굴을 보자 당황하고 반가운 표정이 뒤섞여있었다.


"오늘 네가 안 와서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이렇게 달려왔지 뭐야. 선생님이 유한테 사과를 하러 왔는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러자 유는 머쓱했는지 말을 바꾸었다.


"제가 자는 방 보여드릴까요? 우리가 숨바꼭질을 하면 여기에 숨고요"

하루 종일 엉망진창 해놓은 집구석 구석 보여드리며 때아닌 집 소개를 했다.

나는 우리 집 민낯을 드러내는 것 같아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데 반대로 유는 마치 빛이라도 받는 듯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그리곤 선생님과 유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주방 구석으로 돌아 서서 귀를 쫑긋 세웠다. 

'미안했다고 선생님이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선생님은 너를 진심으로 아주 많이 사랑한다.'는 말에 유는 장난처럼 말했다.


"저 이제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한번 안아줄 수 있냐는 선생님의 말에 유는 선생님을 안아드리기까지 했다.

선생님은 내게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고 했고, 나는 어려운 걸음 해주셔서 감사다고 했다.

내가 아무리 아이의 마음을 달래 보려 했어도 되지 않던 일이 선생님의 등장과 사과만으로 이미 행복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의 마음도 어른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았다.


선생님이 가시고, 유는 혼자 편지를 읽고 와 내게 말했다.

"엄마 나 선생님이 주신 편지 마음속으로 읽었는데 정말 감동적이야"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지고 마음이 찡긋 거린다는 아이를 보니 아무것도 아닌 내 감정도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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