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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희범 May 12. 2024

메디아 루나 - 살리다 10

그는 황급히 자리를 정리하며 나를 맞이했다. 어딘가 쑥스러운 구석을 들킨 것처럼 서두르는 모양이 또 다른 모습이어서 색달랐다.


"좋은 댄서는 좋은 연주자와도 같다더니 연주를 굉장히 잘하시네요. 만 잘 추시는 게 아니라 연주까지 잘하시면 너무 사기 캐릭터 아닙니까."


"하하, 그만 놀리시죠. 사람이 없을 때 종종 연주하곤 합니다. 반도네온은 탱고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악기니까요. 반도네온 멜로디를 듣고 있으면 어딘가 마음이 편해지거든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악기이기도 하고요."

평소와 달리 차분한 말투로 밀러가 말했다.


"굉장히 특이한 악기를 연주하고 계시던데, 이건 무슨 악기예요?"


"이건 반도네온이라고 하는 악기입니다. 참 신기하게 생겼죠?"

말하면서 밀러는 반도네온을 펼쳤다 접었다 하며 보여줬다. 아코디언처럼 생긴 악기였지만 아코디언과는 조금 다르게 어딘가 무분별해 보였고 질서가 없어 보이는 옆면을 가진 악기였다. 어쩐지 밀러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유분방해 보이는 외형을 가졌기에 더 호기심이 일었다. 


"아, 이게 반도네온이군요. 탱고 연주에 자주 등장하는 악기여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반도네온 연주를 직접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생소하네요."


"저희가 수업 때 트는 음악에도 종종 나왔던 음색이니 아마 그렇게 낯설지는 않으실 거예요. 그래도 실제로 듣는 것과 스피커로 듣는 것은 차이가 있죠. 직접 들어보니 어떠셨나요?"


"어, 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슬펐어요. 왠지 모르게 너무 슬펐습니다."


"그렇죠? 반도네온은 기본적으로 그 느낌이 굉장히 슬픈 느낌이 드는 악기죠. 탱고라는 게 복합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장르긴 하지만 그중에도 특히 그 서러움? 한국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그, 아, 단어가 생각이 안 나는데 그게 뭐였죠?"


"서러움? 그러면 혹시 '한'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맞아요! '한', 그런 단어였어요"

밀러가 기억나지 않던 단어가 떠올라서 기뻤는지 손뼉을 치며 크게 말했다. 순간 그의 박수 소리에 움찔했으나 그의 설명이 이어졌기에 집중했다.


"'한', 그 '한'의 느낌과 비슷한 감정선이 있는 게 바로 탱고예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오히려 탱고와 친숙한 아시아 사람이죠. 이미 유전자 속에 탱고를 받아들일 준비가 끝난 거죠. 반도네온 소리가 슬프긴 하지만 매력적이지 않던가요"


"네, 매력적이었어요. 무언가 어디에 홀린 듯 들었습니다. 너무 인상 깊어서 눈물을 흘릴뻔했습니다. 도대체 연주했던 노래가 어떤 노래였나요? 어떻게 그렇게 슬픈 소리가 날 수 있죠?"


"반도네온 음색이 기본적으로 그런 슬픈 감정들을 자극하는 편이긴 해요.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 데이빗 님이 반도네온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요."

설명을 하면서 페이스를 찾은 모양인지 장난스러운 말투로 밀러가 말했다. 

밀러의 말에 잠깐 기분이 상했지만 그 감정의 편린보다 그 슬픈 선율이 머릿속을 맴돌았기에 그의 장난을 뒤로한 채 밀러가 연주했던 곡에 대해 물었다.


"어쩌면 선생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그 음악의 제목이 뭔가요?"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어루 마저 준다고 하죠. 이 음악이 데이빗 님의 마음에 치유로 다가가면 좋겠네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에요. 이 노래는 'el dia que me quieras'라는 곡이에요. 한국말로 하면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날?... 당신이, 나를..."


"네,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날이란 곡이에요. 저도 많이 좋아하는 곡이어서 종종 연주를 하곤 합니다. 저희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곡이셨거든요."


"어머니요? 그러고 보니 밀러 선생님은 아르헨티나에서 자라셨다고 하셨죠?"


"맞습니다. 기억하시네요. 탱고의 본고장 아르헨티나에서 자랐습니다. 말 그대로 원조에서 배우고 온 사람이란 거죠. 탱고를 배우려면 원조집에서 배워야겠죠? 저희가 바로 원조집입니다"

밀러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 쪽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확실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밀러의 모습에 조금은 안심했다. 


"아니, 그런데 어머니가 한국분이 아니신가요? 한국분이신데도 탱고를 좋아하셨네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한국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탱고 유전자를 품고 있어요. 어머니도 마찬가지 아니셨을까요. 이민자의 춤과 음악이었기에 이민자들에게 더 공감됐을지도 모르죠."


"이민자... 의 춤이요?"


"네, 탱고의 시작에는 이민자들의 애환이 담겨있으니까요? 탱고라는 춤을 이렇게도 이야기해요. 춤추는 슬픈 생각. 어딘가에 속하지 못하고 정착해야만 했던 삶은 슬플 수밖에 없으니까요. 다름은 배척당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요."


가볍게 던진 밀러의 말이 가슴에 박혔다. 그의 말이 마치 나를 향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시렸다. 지금까지 살던 세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에 적응해야만 했다. 내가 그랬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나 스스로가 어쩌면 이민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소를 잃지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밀러의 눈동자가 어딘가 나와 닮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밀러는 생각이 많아 보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탱고는 참 매력 있어요. 억압된 마음과 감정에 자유를 주거든요. 데이빗 님도 탱고를 열심히 배워서 자유로워지시면 좋겠네요. 마음에 드셨다고 하니 다음에 한 번 연주해 드릴게요. 집에 가서 찾아서 들어보시는 것도 좋고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날..."

밀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잊지 않기 위해 제목을 읊조렸다.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머릿속에 제목을 각인시켰다. 수업 시간에 가까워졌는지 밀러는 마저 정리를 한다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구석에 앉아 멍하니 그가 수업을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계단에서 누군가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가벼운 것이 내려오는 사람이 여성인 것 같았다. 자연스레 시선을 문쪽으로 돌려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엘리아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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