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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희범 May 23. 2024

메디아 루나 - 살리다 12

밀러는 수업준비를 마쳤는지, 우리가 앉아 있던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나와 엘리아나 사이의 빈자리에 앉았다. 밀러는 우리를 번갈아 보며 미소를 지었고, 분위기를 조금 더 가볍게 만들기 위해 농담처럼 말했다.


"두 분, 요즘 자주 붙어 다니시는 것 같네요. 보기 좋은데요? 그런데, 두 분 키가 얼마나 된다고 하셨죠?"

밀러가 가볍게 말을 던지자, 엘리아나는 살짝 웃으며 내 쪽을 바라봤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며 그녀의 눈치를 보다가 대답했다.


"저는 185cm입니다. 엘리아나 님은요?"


"저는 168이에요. 그런데 왜 갑자기 키는요?"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 딱 좋은 키 차이예요! 그래서 말인데, 두 분이 연습 파트너가 되시면 어떨까요?" 

밀러는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제안했다.

뜻밖의 제안에 나는 잠시 당황해 머뭇거렸고, 엘리아나도 당황한 듯 눈이 동그래졌다.


"우리 둘이요?" 

나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밀러는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파트너요. 탱고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춤이잖아요. 파트너와 함께 연습하면 실력이 더 빨리 늘 거예요. 두 분 키도 잘 맞고, 호흡도 괜찮아 보이는데 한 번 해보는 거 어때요?"


밀러의 말을 듣고 나니, 종종 수업이 끝나고 두 사람이 붙어서 연습하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냥 서로 친한 사람이겠거니 했었는데, 탱고에서는 공연뿐만이 아니라 연습을 같이하는 파트너가 따로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엘리아나도 이 사실을 몰랐는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나도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내 모습이 비쳤다. 문득, '타생지연(他生之緣)'이란 말이 떠올랐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그 말이. 만나고 싶다고 만나는 것이 아니고, 헤어지고 싶다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듯, 인연일 테지, 생각하며 함께 연습을 맞춰보는 게 어떻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흔쾌히 승낙했다. 밀러는 잘 됐다고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아무것도 시작한 게 없어 잘 될 게 없는데도 좋아하는 그의 모습에 괜스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될 때쯤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그녀와 춤을 췄다. 손을 잡고 아브라소를 할 때, 평소와 달리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았다. 여태 배운 내용들이 음악에 맞춰 하나둘 떠올랐다. 살리다 스탭을 시작으로 오쵸 꼬르따또(Ocho Cortado), 오쵸(Ocho), 메디오 히로(Medio Giro), 모르디다(Mordida) 등 배운 동작들을 하나하나 펼쳐보았다. 사분의 사박자에 맞춰 스탭을 하나하나 밟을 때마다 어설프지만 음악의 리듬에 맞아가는 동작들이 알 수 없는 충족감을 느끼게 했다.  그녀와의 호흡은 어색한 듯하면서도 박자에 맞춰 흐르며, 이 순간만큼은 세상 모든 걱정을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4분 언저리의 시간이 지나갔다.


노래가 끝나고 아브라쏘를 풀며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 나 혼자만 신나서 움직인 건 아닌지, 춤이 끝나고 나서 걱정이 됐다. 그녀는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희미하게 짓고 있는 미소를 보며 조금은 안심했다. 수업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 많은 사람들이 플로어에 나와 연습을 하고 있었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잠시 휴식을 갖자, 이야기하고, 테이블이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의자에 앉으려 하는데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걸었다.


"혼자만 신나서 춤을 춘다면 그건 탱고가 아니에요. 다음엔 상대를 더 배려하세요."

불퉁한 목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조이가 서있었다. 조이의 표정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조이는 차가운 눈으로 나를 보더니, 이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다른 수강생들의 동작들을 점검해 줬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지적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루크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웬일로 조이 선생님이 친절히 조언까지 해주시지,  그분이 직접 지적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에요. 데이빗, 꽤 잘하나 보네?"

자리에 앉으며 루크는 친한 척 말을 걸었다.


"아, 그런가요? 잘 모르겠네요. 그냥 제가 뭔가 잘못했겠죠."


"그럴 리가, 방금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치고는 굉장히 잘 추던데, 재능 있어요. 원래 탱고가 남자가 살아남기가 쉽지 않으니 열심히 해봐."

루크는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반존대인 그의 말투가 마음에 걸렸지만 굳이 그 부분을 꼬집지는 않았다. 그 후로도 루크는 탱고에 대해 자신만의 이야기들을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특히, 여자에게 인기가 많기 위해서는 걷기를 잘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안았을 때 안정감이 있는 남자가 인기가 좋다고 했다. 내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는 계속해서 여자에게 인기 있는 춤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열심히 설명했다. 그의 말을 반쯤 흘려들으며, 잘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을 견디기가 어렵다고 느낄 때쯤 밀러가 수업을 시작한다며, 사람들을 중앙으로 모았다. 루크와 떨어지는 방향으로 자리를 옮기며 수업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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