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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희범 May 29. 2024

메디아 루나 - 살리다 13

사람들이 모이자 수업이 시작됐다.


"자, 오늘은 이번 기수 마지막 시간이에요.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 반이 훌쩍 지나갔네요. 마지막 시간인 만큼 다들 집중해 주세요. 모두 파이팅!"
밀러는 특유의 밝은 미소로 분위기를 띄우려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답이 없었다. 조이가 이를 눈치챈 듯, 약간 정색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대답을 해주셔야 저희도 여러분과 소통을 할 수 있어요. 다들 들리시죠? 한 번 대답해 보세요."


그제서야 사람들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큰 목소리를 내기가 꺼려져, 가만히 있던 터라, 조이의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조이는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리더니, 갑자기 나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데이빗 님, 탱고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순간 내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당황했다. 모든 이목이 내게 쏠린 듯한 압박감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가만히 있으면 조이가 포기하고 지나가겠지 싶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황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떠오르는 말을 겨우 내뱉었다.


"춤을... 잘 추는 거요? 아니면 정확한 동작인가요?"


조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탱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상대방을 느끼는 거예요. 상대의 다리가 어디 있는지, 그들이 어떻게 음악을 느끼는지, 어떤 동작을 시도하려는지. 이 모든 걸 느낄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걷기입니다. 걷기는 탱고의 A이자 Z죠."


내 대답이 틀렸다는 사실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주변의 눈길이 느껴지면서 부끄러움에 빠져들었다. 내가 기본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이는 이어서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세라도 아브라소(Cerrado Abrazo)를 하고 걷는 연습을 해볼 겁니다. 이후엔 우리가 배운 동작들을 세라도 아브라소 형태로 다시 해보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

밀러와 조이는 시범을 보였다. 평소에 우리가 했던 아브라소는 일정 거리를 두고 모양을 만드는 형태였다면, 지금의 아브라소는 상체가 서로 밀착되어 둘 사이의 공간이 아예 없는 형태였다. 그러나 둘은 완벽하게 서로를 느끼며 스텝을 밟았다.


"이렇게요 하는 겁니다. 주의할 점은 남자도 여자도 상대에게 너무 기대면 안 된다는 겁니다. 탱고를 출 때 절대 하면 안 되는 일이 바로 상대의 축을 건드는 일이에요. 서로 맞닿아 기대어 있지만 절대로 상대의 축을 건드시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체를 숙여서 기대거나 무게를 완전히 상대방에게 넘겨서 의지하면 안 됩니다. 아시겠죠? 대답!"

조이가 말했다. 사람들은 긴장했는지 곧바로 큰 소리로 대답했다. 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강생들은 서로 짝지어진 사람들과 상체를 포개어 안으며 조이와 밀러가 보여준 형태를 따라 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 또한 그들을 따라하기 위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처음 해보는 동작은 어딘가 어설펐고 불편했다.


"익숙하신 분들도 있고, 아닌 분들도 있네요. 일단 걷기부터 해 보세요. 걷기가 제일 중요해요. 걷는 걸 할 수 있어야 춤을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안은 상태에서 걷는 것부터 예요."

조이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각성한 듯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남자들이 밀착된 상태에서 걷는 것이 익숙한 듯 거침없이 걸었다. 그와 반면 나는 혹여나 상대의 발을 밟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문득 거울에 비친 모습이 보였다. 거울 속의 동작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남자들은 자연스레 밀착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지만, 나는 혹시나 상대의 발을 밟을까 두려워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다 보니 엉덩이는 뒤로 빠지고 상체는 엉거주춤 굽혀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조이가 곁을 지나며 한마디 했다.


"탱고에 집중하세요. 잿밥에 신경 쓰다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잖아요. 탱고는 그렇게 만만한 춤이 아니에요. 정신 차리세요."

조이는 오직, 나만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나만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내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나는 뜨끔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과 그녀의 말이 겹쳐지며 귀가 빨개졌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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