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롱가, 우연은 없다

인연

by 양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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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만남에도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
밀롱가에서 당신을 만났다면, 그것은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오직 당신과 나, 그리고 바닥에 깔린 탱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밀롱가(Milonga)는 본래 음악의 장르에서 시작됐다. 아프리카계 리듬과 스페인계 민속 음악이 섞이며 탄생한 ‘밀롱가’라는 음악은 이후 탱고의 선조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 음악이 연주되는 장소와 모임을 ‘밀롱가’라 부르게 됐다.

19세기 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항구와 외곽 빈민가에서 남성 노동자들과 이주민들이 모여 춤을 추던 곳—그것이 밀롱가의 시작이었다. 매음굴과 술집, 뒷골목이 그들의 무대였고, 밀롱가는 그 거칠고도 생생한 삶의 배경이었다. 단지 춤을 추는 공간이 아니라, 사회의 경계에 서 있던 이들이 존재를 드러내던 방식이자 유일한 표현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밀롱가는 점차 도시로 들어왔고, 귀족의 살롱으로 확장됐으며, 오늘날엔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탱고의 중심 무대가 됐다. 하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밀롱가는 ‘춤을 추는 장소’임과 동시에, 인연이 만들어지고, 낯선 이들이 스치며, 말없이 교감하는 공간이다.

탱고를 막 시작한 이들에게 밀롱가는 꿈처럼 멀고도 가까운 장소다.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영원한 노스텔지어 같기도 하다. 소셜이기 이전에 춤이기에, 춤으로 말할 수 있어야 대화가 가능하다. 언어를 익히기 전에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것처럼, 탱고를 어느 정도 준비하지 않은 채 밀롱가는 초대받지 못한 파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탱고를 추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결국엔 밀롱가에서 마음을 나누고 싶어 한다.

어느 날 우연히 마주한 사람과 눈빛을 주고받고, 음악이 흐르자, 서로를 안고, 몇 곡을 함께 걷는다. 그 짧은 시간이 끝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지만, 몸과 마음에 남겨진 감정은 오래도록 잔향처럼 남는다. 그곳에는 아픔도, 상처도, 사랑도 잊힌다. 그래서 탱고를 배우는 사람은 기를 쓰고 밀롱가에 가려 한다. 밀롱가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만남’이고 ‘기억’이며, 결국 어떤 인연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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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탱고를 시작했을 때, 나는 밀롱가에 대한 개념조차 없이 입문했다. 그저 춤이 좋아서 시작했기에, 밀롱가가 뭔지, 탱고의 문화가 어떤 것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탱고를 배우면 배울수록, 특히 사람들과 교류할수록, 자연스럽게 ‘밀롱가’라는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탱고를 배운 지 넉 달쯤 되었을 때, 선배를 따라 강남의 한 밀롱가에 가게 됐다.

그때는 몰랐다. 밀롱가에서 3년 차 미만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무지에서 나오는 용감함이 나를 이끌었고, 나는 생전 처음으로 까베세오(Cabeceo)를 시도했다. 탱고는 초보에게 조금은 냉정하다. 함께 추는 춤이기에, 거의 12분 동안 이어지는 한 딴따(tanda; 세 곡에서 네 곡으로 구성된 음악 묶음)를 초보와 보내는 건 서로에게 적잖은 모험이기 때문이다. 물론 실력으로 상회할 수 있다면 또 다른 이야기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새로운 사람에 대한 경계와 긴장감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대부분의 까베세오는 실패했다. 아니, 모두가 실패였다. 다행히 함께 간 선배의 지인분이 몇 딴따를 함께 해주셔서, 간신히 론다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그때 그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디살리의 음악이 깔렸고, 함께 나눈 아브라소(포옹)는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로 떨렸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 주변의 땅게로스들과 부딪히지 않을까 하는 걱정, 내 리드가 전달될까 하는 불안감—모든 감정이 론다 위에 쌓였다.

많은 생각이 나를 떨리게 했고, 상대와 조심스럽게 호흡을 맞춰 첫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한 딴따가 끝났다. 어떻게 춤을 췄는지, 어떤 흐름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상대가 불편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춤이 끝난 후 인사를 하고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는데, 함께 춤을 췄던 분이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나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쳐 인사를 하자, 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이후로 다시 만날 일은 없었지만, 그 짧은 인연은 내게 아주 오래 남았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됐다. 밀롱가는 단지 춤을 추는 곳이 아니며, 누구와 춤을 추느냐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밀롱가는, 나 자신과 마주하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것을. 거울 앞에 선 나보다도 더 솔직하게 나를 드러내게 만드는 공간, 감추고 싶었던 감정까지 끌어내는 음악, 숨기려 했던 불안마저 포옹 안에서 전해지는 그 특별한 자리. 나는 그날 이후, 춤을 더 잘 추고 싶다기보다, 더 진실하게 추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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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는 삶과 닮았다.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모든 만남이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서로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진심이 있다면, 그 서툰 만남조차도 인연이 된다.

마치 오래된 격언처럼, “우연한 만남은 없고, 모든 인연에는 그 이유가 있다.”
그 말이 그날 밤 내게 처음으로 와닿았다. 밀롱가를 배운 그날 그녀를 만나 용기를 얻은 것처럼, 그리고 나는 비로소 밀롱가에서, 탱고를 조금 느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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