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네온, 숨으로 접히는 심장

Bandoneon

by 양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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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롱가의 조명이 낮게 깔리면 가장 먼저 깨어나는 건 사람보다 숨이다. 탱고의 선율 끝에는 늘 반도네온이 있다. 팔을 펼치고 접을 때, 홀 안의 공기가 천천히 탱고로 물들어 간다. 반도네온은 탱고의 색을 짙게 만든다. 우리는 그 악기가 만들고 지우는 호흡 사이에 선다. 그러다 문득, 이 짙은 숨이 배어 있는 악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한다.


반도네온의 시작은 라플라타 강변이 아니라 독일의 공방이었다. 교회와 마을 축제를 위해 만든, 바람이 지나가는 작은 상자. 두 손으로 열고 닫아 소리를 얻는 구조 덕에 공기는 사람들의 신앙을 더 진하게 했다. 금속 리드와 가죽 주름에서 나온 음색이 공기를 물들이고, 사람들은 그 공기를 들이마시며 마음을 채웠다. 그래서였을까. 그 짙은 숨결을 품은 악기는 운명처럼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로 흘러들었다. 이민자들의 가방 속에서, 선창의 냄새와 바람과 함께.


라플라타에 닿은 뒤, 반도네온은 직업을 바꾼다. 성(聖)스러운 예배의 반주가 아니라, 항구의 밤과 도시의 외로움을 말하는 성(性)스러운 언어가 된다. 그 작은 차이로 탱고는 제 목소리를 찾아간다. 그 무렵 반도네온은 탱고의 곁에서 심장으로 자리 잡는다. 현악이 선을 긋고, 피아노가 바닥을 깔면, 반도네온은 그 위에 사람의 호흡을 얹는다. 한때 독일 공장에서 태어나 신앙을 흔들던 음이, 이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탱고로 물들였다. 반도네온 덕분에 탱고는 한 걸음 더 깊어졌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때로 반도네온은 춤과 춤을 잇는 세 번째 파트너 같다. 리더와 팔로워 사이에 앉아 아브라소의 안쪽 심장을 뜨겁게 만들어 주는 존재. 둘을 더 밀착시키고 하나 되게 하는 파트너. 그 주름을 펼칠 때마다 악기에 접힌 탱고의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탱고의 빛깔을 띠게 된다. 밤마다 쌓인 도시의 외로움이 기록된다. 거절된 까베세오의 쓸쓸함, 성공한 간초의 짜릿함, 바리다로 확인하는 은밀한 합의, 붐비는 론다에서 그려지는 플라네오의 궤도, 모두가 그 주름에 접혀 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선율과 함께 우리에게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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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네온의 선율이 밀롱가를 가득 채우면 우리는 각자의 책을 꺼내든다. 탱고 속에는 각자의 이야기가 담긴다. 욕심이 앞서던 밤도 있다. 음악이 최고조에 다다르자 상체를 과하게 돌렸고, 파트너의 발끝이 가볍게 떠올랐다. 서로의 호흡이 반 박 어긋났다. 갑자기 튀어버리는 LP판처럼 춤도 어딘가에서 툭하고 끊긴다. 서로가 서로의 표정을 확인한다. 다행히도 우리가 쌓아온 3곡의 춤이 우리의 믿음을 지켜준다. 작은 미소로 서로에게 사과하며 다시 스스로 축을 점검한다. 반도네온 선율이 어색한 분위기 위로 내려앉는다. 모든 걸 감싸 안는다.

어떤 날은 론다가 마음처럼 돌지 않는다. 야속하게 앞 커플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스텝을 펼칠 수 없어 우리는 그저 박자에 맞춰 제자리에서 걸을 뿐이다. 어떤 피구라도 표현도 춤에 담을 수 없다. 그때 반도네온 선율이 들린다. 마치 내게 말을 건내는 것 같다. 지금은 잡생각을 하는 때가 아니야, 탱고를 춰야 할 때야. 반도네온의 음색이 정신을 깨운다. 상대와 나 사이의 거리를 가늠한다. 아브라소에 담겨 있는 두 개의 심장을 느껴본다. 그 박동이 하나처럼 느껴진다. 이 순간 우리가 함께 춤을 그려간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때론 피구라나 표현보다 중요한 게 있다. 심장이 강하게 뛴다.


가끔 선율의 끝에 쉬고 있는 오래된 반도네온을 본다. 가죽의 주름마다 밤이 접혀 있고, 금속 리드에는 사람들의 시간이 묻어 있다. 그 시간이 모여 탱고의 숨을 만든다. 우리는 그 숨을 빌려 서로의 어깨를 풀고, 같은 길이로 호흡을 맞춘다. 마지막 곡이 론다에 깔리면, 악기는 한 번 더 열리고 한 번 더 닫힌다. 짧은 들숨과 날숨 사이, 반도네온이 말한다. “나는 여기 있고, 너를 느낀다.” 탱고가 아주 작게 답한다. “그래, 이 밤의 격정은 우리의 것.” 우리는 손을 놓지만 공기는 아직 따뜻하고, 목재 바닥엔 얇은 여운이 남는다. 반도네온은 감탄사처럼 끝을 세우지는 않는다. 그 대신 다음 문장을 위한 여백을 남길 뿐이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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