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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희범 Jul 01. 2024

메디오 루나 - 오쵸 5

"아진 교무님, 아니, 이제는 아진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환속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네, 그렇게 됐습니다. 지금은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어요. 이렇게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수호의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대답했다. 성직자로서 동등했던 위치가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기에, 그에게 떳떳하게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수호는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날 사람은 결국 만나게 된다는 말, 저는 진심으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허투루 사람을 만나게 하지 않으시니까요. 제가 그간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아무 소식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죠. 우리가 수학 과정에서부터 친하게 지냈었잖아요."


나는 짧은 침묵 끝에 말을 꺼냈다.

"신부님,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기적입니다. 저에겐 그저 기적이 없었을 뿐이에요. 그것뿐입니다."


수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마침내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군요... 마음고생이 심했겠어요."


수호의 공감 어린 목소리에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여전히 불편함을 느꼈다. 그에게 속내를 다 털어놓을 수도 없었고,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고통도 있었다.


"신부님, 혹시 수녀님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럴 리가요. 수녀님들은 제게 가족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가족에게 느끼는 사랑과 이성적인 사랑은 다르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잠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렇죠, 하지만 누군가는 같은 핏줄끼리도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한 단체에서 지내는 사람들이지, 혈연 관계는 아니잖아요. 저는 제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고, 그게 제 죄였던 거죠."


수호의 얼굴에 걱정과 이해가 교차하는 걸 보았다.


"알겠습니다. 더는 묻지 않도록 하죠.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입니다. 그분에 대한 믿음만 있다면, 어떤 시련이든 극복할 수 있습니다."

수호가 내 손을 잡고 다독였다. 그의 온화한 눈빛에서 나는 잠시나마 위로를 느꼈다. 하지만 그에게도 말할 수 없는 깊은 심연이 내 안에 있었다. 아무리 그가 자비로운 사람일지라도 해결할 수 없는 내면의 상처였다.


나는 조용히 그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믿음이 중요하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현실이 더 소설 같지 않나요?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만, 앞으로 계속 일을 함께 해야 하는데, 자꾸 저를 이렇게 특별하게 보시면 오히려 더 힘들 것 같아요. 그냥 편하게 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수호의 표정에서 잠깐의 안타까움이 스쳤다. 그는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말을 멈추게 했다.

"신부님의 마음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저는 더 이상 없습니다. 이제 그저 평범한 출판사 직원일 뿐이에요. 그러니 저를 신도들 대하듯 대하시면 좋겠어요. 그게 우리 둘 다 편할 겁니다."


그의 눈빛이 무겁게 나를 따라왔다. 잠시 우리 사이에 가라앉은 침묵이 길게 느껴졌다. 그러다 탁자 위에 두었던 핸드폰이 울리며 그 무거운 순간을 깼다. 시간을 확인하니 이제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때였다. 나는 짐을 챙기고 자리를 떠났다. 핸드폰을 보니 엘리아나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 연습 언제 할까요?]

메시지를 확인하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어딘가 마음이 놓이는 문자를 받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회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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