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lida 5
밀러의 말 때문이었을까. 그날 밤 꿈자리가 사나웠다. 오랜만에 찾아온 불면의 밤이 다시 시작된 것 같았다. 한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잘 거라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점점 언짢아졌다. 조금 더 침대에서 늦장을 부리고 싶었지만, 몸에 배어 있는 습관은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새벽 네 시, 언제나처럼 눈이 저절로 떠졌다. 한 번 눈을 뜨면 다시 잠들기 어려웠기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뭘 해야 할까?’라는 고민 끝에 평소처럼 익숙한 것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닥에 앉아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했다. 매일 새벽마다 하던 일이었기에 자연스럽게 호흡을 따라갔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머릿속이 잡다한 생각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정리되지 않은 과거의 기억들이 날카롭게 떠올라 숨통을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 잡념을 없애려 할수록, 오히려 머릿속은 더 혼란스러워졌고, 생각은 마치 타오르는 불길처럼 점점 커져만 갔다. 평소 차분함을 되찾아주는 시간이 오히려 머리를 더 뜨겁게 만드는 시간으로 변해갔다.
이대로 앉아 있는 건 오히려 해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몸을 움직여서 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워야만 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은 탱고였다. 선생님들이 알려준 연습 스텝이 떠올랐고, 그 동작들을 따라하면 머릿속 불안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살리다 스텝을 떠올리며 앞, 뒤, 옆으로 반복했다. 혼자 살고 있는 원룸에서의 작은 체조가 시작된 것이다. 혹여 아래층에서 항의가 들어올까 봐 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스텝을 밟았다. 그렇다 보니 다리에 힘이 더 들어가고 스텝이 더욱 어려워졌다.
약 15분쯤 지나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땀이 흐르자 머릿속의 잡생각은 사라지고, 오직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만 남았다. 선생님들처럼 마음이 닿는 동작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그 자리를 채웠다. 한 시간가량 스텝을 반복한 뒤, 마침내 머릿속이 정리된 듯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아침 여섯 시. 출근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출근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순간 어색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일하러 나간다는 것이 일종의 현실임을 깨닫고, 가볍게 뺨을 두드리며 정신을 차렸다.
성수역까지 가는 길은 제법 멀었다. 서둘러 준비를 해야 했다. 그래도 이호선 라인에 직장을 구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역까지 걸어가는 시간을 생각하며 간단하게 시리얼에 우유를 부어 아침을 해결했다. 아침을 먹으며 오늘 해야 할 업무를 정리했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지만, 현실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했다. 모두에게는 평범하고 당연한 일상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떠밀려 온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마치 이민자처럼 이 낯선 땅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발버둥치며 정착하려 애쓰고 있는 이민자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두려운 마음을 안고 또다시 출근길에 올랐다. 문득, 아카데미에서 탱고를 배웠던 그때가 떠올랐다. 빨리 금요일이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