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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희범 Nov 12. 2024

메디아 루나 - 살리다 4

salida 4

밀러는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살짝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그를 계속 응시하다가, 내가 너무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황급히 시선을 커피잔으로 돌렸다. 당황한 마음에 커피를 한 모금 마셨는데, 커피가 뜨거워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밀러는 미소를 짓고 티슈를 건네주었다. 커피가 튄 테이블을 닦으며 나도 모르게 사과하려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저 테이블을 닦는 것에 집중했다. 밀러가 조용히 말했다.


"탱고, 재미있나요?"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급히 테이블을 닦고 답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한 번쯤 춤을 배워보고 싶었는데, 꼭 탱고일 필요는 없었거든요."


"하지만 지금 배우고 있는 건 탱고네요?"

밀러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서 어딘가 알 수 없는 확신이 묻어났다. 마치 모든 것이 정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당황해서 대답했다.


"그, 그렇죠?"


"게다가 두 번째 만남에 벌써 입문반까지 등록하셨잖아요. 두 번째 만에 말이죠. 운명 같네요."

그의 자신감 있는 말투는 조금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확실하지 않은 인생에서 무언가를 운명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너무 성급해 보였다. 단지, 그와 말하면 할수록 그의 영업 스킬이 정말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그런가요, 하고 어물쩍 넘어갔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밀러는 마치 내 안에서 무언가를 읽으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그였으니, 나는 그가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렸다.


"긴장하지 마세요. 제가 무슨 무서운 사람도 아니잖아요. 그냥 말해주고 싶었어요. 젊은 사람들이 이곳에서는 잘 안 보이거든요."

밀러는 내 긴장한 모습을 보고 말없이 웃었다. 밀러가 보기에도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던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말이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지는 않았다. 밀러는 이어서 말했다.


"탱고는 그저 배우고 싶다고 배울 수 있는 그런 춤이 아니에요. 운명처럼 다가오는 춤이죠. 저도 처음에 탱고를 배울 때, 그 춤은 마치 저를 찾아온 것 같았어요. 데이빗 님에게도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반가워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하신 거죠?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가만히 밀러의 말을 듣다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었지만, 운명이란 말에 자신도 모르게 반응하고 말았다. 

밀러는 그런 모습에 조금 더 흥미롭다는 표정을 보였다.


"운명은 말로 설명할 수 없어서 운명이라고 부르죠.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어요.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보이기 시작하죠. 생각해보세요. 홍대에서 여러 춤들 중 탱고를 만나 배우게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신기하지 않나요? 벌써부터 데이빗 님이 론다에서 춤추는 모습을 상상하면 기대가 돼요."


"배우기로 했으면 최선을 다해야죠. 다만, 운명인지는 모르겠네요.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나름대로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면 충분해요. 탱고를 설명할 때 가장 시적인 표현이 있는데, '네 개의 다리, 하나의 심장'이라는 말이 있어요. 아마 데이빗 님은 이 탱고라는 타일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거예요. 답을 찾는 것 같거든요. 열심히 찾아보세요. 그 답이 탱고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밀러는 그 말을 끝으로 내게 가볍게 포옹을 하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이 인사는 탱고 스타일이에요. 다음에 만나면 또 이렇게 인사해요."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다른 수강생들 쪽으로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머리 숙여 작게 인사를 했다. 조이는 휴게 공간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문을 열고 아카데미를 빠져나왔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며 밀러의 말을 떠올렸다.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지 예의를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특히, 그가 내게 말한 운명, 탱고에 대한 확신, 그런 말들이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그가 나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그는 그렇게 쉽게 나를 파악할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냥 그대로 모든 걸 넘기기에 그의 말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그의 말이 어쩐지 머릿속을 맴돌았다. 계단을 지나 지상에 도착했을 때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러나 그걸 인정하기에는 가시지 않은 거부감이 있었다.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남의 말에 쉽게 흔들릴 만큼 나약하지 않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의 말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로 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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