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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아 루나 - 살리다 3

살리다(salida)

by 양희범

수업이 끝나자마자 엘리아나에게 다가갔다. 엘리아나와 함께 오늘 배운 걸 연습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엘리아나는 이미 짐을 챙기고 문을 나서고 있었다. 하는 수없이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쉽지만 다음 수업을 기다려야 했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은 이미 짝을 지어 연습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이 능숙하게 다양한 동작을 연습하는 모습을 보니, 대부분 경험이 있는 것 같았다. 나만 초보인 것 같아 주눅이 들었다.

조용히 거울 앞에 서서, 오늘 배운 스텝을 따라 하며 나름 열심히 연습해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쓰였다. 그래도 다음번에 엘리아나와 함께 춤출 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바람으로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거울 속 모습에 집중하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탱고는 처음이신가 봐요?"

조금 느끼한 목소리였지만,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숨기며 그를 바라봤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통통한 체형의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아, 네, 뭐, 춤 자체가 처음이어서요."


"오, 춤이 처음이신데 탱고를 배우세요? 굉장하신 분이시네요. 어쩌다가 탱고를 배우시게 된 거예요?"


"아, 전단지를 보고 알게 됐어요. 굉장히 로맨틱해 보이더라고요."


"잘 보셨습니다! 탱고는 정말 로맨틱한 춤이죠. 혹시 '여인의 향기'라는 영화 보셨어요? 그 영화 보고 탱고 입문하는 분들 많더라고요."


"아, 아니요. 사실 탱고가 어떤 춤인지, 문화적인 배경은 잘 몰라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탱고는 재밌는 춤이에요! 남자가 잘 추면, 여자가 줄을 선다고요!"

그가 해맑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는 정말로 신나는 표정 같았다. 신나서 이야기하던 그는 나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 같자 아차 싶었는지 다시 내게 물어왔다.


"그런데 닉네임이 뭐예요?"


"저는 데이빗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루크예요. 반가워요. 오늘 끝나고 같이 맥주 한 잔 하실래요? 인연인데."


"아, 오늘은 좀 일정이 있어서요. 죄송해요."

사실 일정은 없었지만, 처음 만난 사람과 맥주를 마시는 게 부담스러웠기에 정중히 거절했다.


루크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이 웃으며 다음에 다시 시간을 갖자고 했다. 두 번이나 거절하기가 애매해서 결국 나는 다음에 그와 시간을 보내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약속을 하고 나서야 루크는 떠났고, 떠나면서도 탱고가 어렵다고 도망가면 안 된다, 하며 농담을 던졌다. 그의 능청스러운 말이 이상하게 싫지만은 않았다.


루크가 떠나고 나니 무언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혼자서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 남의 연습을 훔쳐보거나, 남들이 춤추는 걸 보는 것 말고는 할 만한 일이 없었다. 다른 페어들의 연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존재감은 그 사람의 부재를 통해 가장 크게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빈자리가 느껴질수록 외면해야 견디는 게 사람이었다. 더 깊은 생각이 이어지기 전에 나는 서둘러 짐을 챙겼다. 홀로 남은 이 공간이 더 이상 나를 붙잡지 못하도록 벗어나고 싶었다. 이곳은 흥미롭지만 동시에 쓸쓸했다.


탱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문을 나서려는 찰나,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밀러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커피 한 잔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의 초대에 잠시 짐을 내려놓고 구석 테이블에 앉았다.

커피가 준비되는 동안, 무의미하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누군가의 연락이 올 것 같은 기분에 화면을 껐다 켰다 반복했다. 사실 연락을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는데, 그저 습관처럼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원두가 갈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커피 향이 코를 찔렀다. 밀러가 커피 두 잔을 들고 다가와 자리에 앉으며 내게도 한 잔을 건넸다. 그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침묵 속에서 어떤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기다리며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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