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희범 Oct 29. 2024

메디아 루나 - 살리다 2

살리다(salida)

"시작 전에 자기소개를 깜빡했네요. 돌아가면서 자신의 닉네임 소개하고 인사 부탁드립니다."

서로 파트너를 마주하려는 순간, 밀러가 진행을 잠시 멈추고 말했다. 

처음 느꼈던 긴장감에 비해 이제는 조금 편안해질 만했지만, 갑작스러운 소개 요구에 다시 약간의 불편함이 느껴졌다. 커넥션을 시작하기도 전에 먼저 통성명을 해야 한다니, 어쩐지 그 타이밍이 미묘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밀러는 마치 아주 중요한 절차라도 되는 것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진행을 이어갔다.


사람들은 돌아가며 각자 자신의 닉네임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가명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탱고라는 세계에서는 본명을 감추고 새로운 자아를 입는 것이 하나의 규칙처럼 보였다. 나도 그들에 맞춰 준비한 이름을 말했다.


"반갑습니다. 데이빗입니다."

 

수업을 듣는 사람의 숫자가 제법 됐기에 멀리 있는 사람도 들을 수 있게 목소리에 힘을 주어 인사했다. 내 목소리는 제법 크게 나왔지만, 그럼에도 손이 떨렸다. 순간적으로 손을 모아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신경 쓴 제스처는 아니었지만, 낯선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살짝 귀가 빨개진 걸 느꼈지만, 다행히도 누구도 내 쪽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엘리아나예요. 잘 부탁드려요."

이어서 인사를 주고받았던 그녀가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작고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잠시 잊고 있던 누군가의 모습이 스치듯 내 머릿속을 지나갔다. 잊고 싶은 기억이 억지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생각을 쫓아내듯 박수를 쳤다. 스스로에게 집중하려고 박수 소리를 크게 내면서, 머릿속의 무거운 감정들이 그 소리 속에 묻히기를 바랐다.


그 짧은 순간이 지나자 자기소개가 끝나 있었다. 밀러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수업을 이어갔다. 그는 앞에 선 상대방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연습 아브라소(Abrazo)를 해보라고 했다. 나는 서둘러 엘리아나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강습생들은 그들을 따라 상대방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서로 간의 간격을 만들었다. 둘 사이의 간격이 무겁게 느껴졌다.


"탱고에서는 이 간격이 중요해요. 너무 가까워서도, 너무 멀어서도 안 됩니다. 이 간격이 춤을 아름답게 만들고, 서로를 존중하게 하는 거죠. 상대방의 축을 건드리지 않도록, 이 거리감 속에서 춤을 유지하는 법을 익히셔야 해요."


조이는 우리를 한 명씩 훑어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사람들을 훑는 조이를 바라보다 조이와 눈이 마주쳤다. 조이는 알아듣겠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잘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는 알아들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간격에 대해 설명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경고처럼 들렸다. 조이는 고개를 돌리며 이어 말했다. 엘리아나와 나는 그 간격을 유지한 채 연습 아브라소를 이어갔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과 긴장이 전달되었다.  


"이제 상대방의 무게중심을 느껴보세요. 탱고의 기본은 무게중심입니다. 한쪽 발에만 무게를 실어야 하고, 그 무게가 움직임에 따라 변할 때 상대방과 함께 흐름을 맞춰야 해요. 혼자서 추는 춤이 아니니까, 상대방의 중심을 읽어야 합니다."


어색함에 눈치를 보다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밀러와 조이를 따라 하자 나도 그들을 따라 엘리아나와 함께 호흡을 맞췄다. 무게 중심을 옮길 때마다 그녀가 나를 따라 무게 중심을 옮기는 게 느껴졌다. 크게 맞닿아 있는 곳이 있는 것도 아닌데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 중심의 이동이 나를 더 몰입하게 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스텝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자연스럽게 중심을 맞추었다. 상대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전해지며, 나는 그녀가 나와 같은 리듬에 맞춰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스텝이 부드러워지고, 나는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엘리아나와 나는 그 짧은 순간 동안 완벽한 호흡을 맞춘 것 같았다.


"자, 이제는 본격적으로 살리다 스텝을 배워보겠습니다. 이쪽을 보시겠어요."

밀러가 주의를 환기시키며 수강생들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 덕분에 나는 그제야 내가 몰입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이다. 밀러와 조이는 우리를 향해 손짓하며, 여섯 개의 기본 스텝, 즉 식스 살리다를 다시 한번 보여주기 시작했다. 밀러는 사람들이 집중하는지 가만히 살피더니 이어서 말했다.


"오늘 배울 스탭은 앞서 보여드렸던 식스 살리다 스탭이에요. 발도사(la baldosa)라고도 하는데 여섯 개의 스탭이 마치 타일처럼 생겼다고 해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보통은 식스 살리다 스탭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여섯 개의 스탭이 탱고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스탭이에요. 많이 쓰게 될 스탭이니, 자세히 보세요."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조이와 함께 스텝 시연에 나섰다. 마치 그들의 몸짓에 맞춰 음악이 흐르는 것처럼, 두 사람은 여섯 발자국을 부드럽게 이어갔다. 뒤로 한 걸음, 옆으로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다시 옆으로 한 걸음. 그들의 발은 정확하고도 유려하게 공간을 가로지르며 식스 살리다 스텝의 기본을 완성했다. 밀러는 자연스럽게 머리를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


"굉장히 쉽죠. 자, 이제 따라 해보겠습니다. 파트너 체인지 해주시고요, 남성분들은 반시계 방향으로 움직여 주세요."

이제 막 파트너와의 호흡에 익숙해졌는데, 다시 자리를 옮기라고 하니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밀러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아쉬움을 담아 손바닥을 가볍게 부딪치며 그라시아스, 라고 인사한 후 자리를 옮겼다. 새로운 파트너에게 인사를 건네고 아브라소를 잡았지만, 처음 파트너와의 자연스러운 연결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밀려오는 잡념이 있었지만, 잡념을 밀어내고 밀러와 조이의 말에 집중하려 애썼다.

이전 01화 메디아 루나 - 살리다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