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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리터 Aug 27. 2018

파리에서 맞은 생일

타국에서 생일날을 보내는 날

4월 말의 유럽은 은근히 춥고 으스스한 구석이 있다. 특히 파리에 있는 동안은 날씨가 계속 안좋았다. 런던에서 맑았던 하늘이 파리에서 쓸 날씨 운을 뺏은 모양이다. 덕분에 나의 빅벤은 청명한 하늘 아래 걸려 있지만 에펠탑은 우중충한 구름 사이에 끼어 있다. 그렇게 안좋던 날씨가 딱 하루 맑아졌다. 마지막 날 파리의 시내는 서늘한 바람은 좀 있었지만 햇빛은 그득했다. 내 생일이었다.


# Happy Birthday To Me

여행 중 날씨는 더 바랄 수 없는 선물이다.

런던에서 사고 꺼낸 적 없는 민소매 원피스를 드디어 입었다.

기분도 좋고, 날씨도 좋고, 아무튼 이래저래 좋았던 날에 노트르담성당으로 향했다.

노트르담의 내부는 고전 그 자체다.

스테인드글라스 예술의 결정체인 장미창은 옛날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인 글라스데코를 붙여 둔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촌스러운 느낌까지 든다.

그리고 유럽 성당의 대부분이 그렇듯 노트르담도 전망대 역할을 한다.

시떼섬은 과거에 파리라고 불리던 곳이다.

노트르담 위에서 시떼섬을 바라보면 옛 파리의 귀족들이 마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영화 촬영을 해도 손색없을 만큼 옛 파리의 모습이 남아 있다.

만약 파리에서 스탑오버를 하며 한두 시간 정도 둘러본다면 시떼섬을 둘러볼 만하다.

이 작은 섬에 성당, 법원과 같은 파리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섬 아닌 섬 시떼는 생김새도 역할도 파리의 심장부다.


# 오늘은 편지를 쓰겠어요

누군가에게 엽서를 쓰고 싶은 날이다.

생샤펠성당에 들어가려다 인파에 질려 마음을 고쳐먹고, 노점에서 파는 엽서를 사 들고 우체국으로 갔다.

엽서에는 에펠탑부터 세느강까지 지금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담겨있다.

그저 걸어가며 찍는 모든 풍경이 엽서가 되는 마법 같은 도시다.

내가 보고 있는 건물 자체가 내 안부를 전해줄 것이다.

엽서들을 채워 한국으로 보내본다.

나는 지금 파리에 있고, 씩씩하게 낭만을 즐기고 있노라고.


# 뜻밖의 축하

비싸고 맛없는 그저 예쁘기만 한 음식이 먹고 싶은 날이다.

파리에서 혼자 생일을 보내는데 약간의 허세는 허락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미슐랭에 나오는 레스토랑에 갈 희망, 용기, 재력이 부족하다.

생일을 챙기는 편은 아니지만 앞으로 파리에서 생일을 맞는 일은 또 없을 것 같아서 노트르담이 보이는 노천식당에 자리를 잡는다.

주변으로 가면 싸고 맛있는 스테이크 집들도 많다고 하지만 오늘은 장미창이 보이는 곳에서 샴페인 한잔을 마시고 싶다.

양파스프와 스테이크, 그리고 샴페인 한잔을 주문했다.

종업원이 들고 오는 샴페인에 폭죽이 꽂혀있다.

설마 알고 주는 걸까?

짧은 폭죽은 사진 찍을 틈도 없이 빠르게 타다닷 타버렸다.

아무에게나 폭죽을 꽂아주는 메뉴였겠지만 나는 멋대로 그가 나를 축하하기 위해 준비한 이벤트라고 생각한다.

나의 태어남이 아닌 오늘의 삶을 그가 축하해 주는 것이라고 믿기로 한다.

태어나 지구 반대편까지 오느라 수고했다고.

또 한번의 생일을 맞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을 알고 있다고.

이 길 위에 있는 나를 위로해준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입맛으로는 평범한 음식이었지만 그날은 꽤 맛있었던...


# 생일에 본 어느 여자의 죽음

시떼섬을 나와 콩코드 광장으로 갔다.

며칠 전에도 지나친 곳이지만 숙소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나서 다시 왔다.

마리 앙뚜아네뜨가 처형당한 대단히 상징적인 장소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미처 보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가 처형당한 바로 그 자리.

다시 찾은 광장 한복판에는 쓸쓸한 판이 하나 박혀 있다.

프랑스왕가의 무덤과도 같으며 시민 혁명의 요람과도 같은 자리가 거기 있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곳은 관광객들의 발에 밟히고 흙이 뿌려져 있다.

왕가의 죽음은 시대의 흐름상 당연했지만 마리앙뜨와네뜨의 죽음은 부자연스럽게 만져졌다.

오벨리스크의 장엄함이 솟은 가운데 정치세력의 마녀사냥으로 생을 마친 그의 최후가 광장 한가운데 덜렁 남겨져 있었다.


# 파리가 흐르는 저녁

샹젤리제에서 손에 넣은 마카롱을 들고 바토무슈 선착장을 찾았다.

센강은 많이 봐서 유람선을 탈 생각은 없었지만 티켓이 생겼다.

파리를 마무리하기에 꽤 적당한 방법이다.

한강 유람선의 모티프였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해지기 직전에 반짝거리기 시작한 파리를 보기에도 괜찮은 방법이다.

며칠을 있어도 파리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는데 강물에 떠서 파리를 기웃거려보니 여기가 파리구나 싶다.

떠날 시간이 가까워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바토무슈에 타고 센강에서 흐른 시간은 에펠탑으로 이어졌다.

파리에 왔다는 사실을 죽도록 느끼게 만드는 이 탑이 내 마지막 파리다.

내 생일과 파리가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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