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들린 스위스의 기억
산과 들이 펼쳐진 스위스는 내 상상 속 유럽의 이미지 중에서 '자연'을 담당했다. 전 국민이 알프스 소녀 하이디일 것 같은 스위스에서 산악열차를 타는 건 내 유럽여행의 환상 중 하나였다. 하지만 장기여행이 내 뜻대로 될 리 없고 여행 중반쯤에는 스위스에 대한 생각이 많이 시들해졌다.
아직 ktx가 생기기 전.
세계의 기차여행을 소개하는 tv프로그램에서 떼제베를 봤다.
기술력이 유명했겠지만 그때의 나는 떼제베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가는 기차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ktx가 익숙해지고 고속열차가 별거 아닌 시대를 살다 보니 떼제베의 신비성은 사라졌다.
그러다 문득 내가 지금 떼제베에 타고 있음을 각성하고서야 알았다.
아, 내가 이걸 꼭 타보고 싶었는데.
바라던 일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그것이 소망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로또 당첨 정도 되는 큰 소망은 너무 커서 아무 때나 불쑥 보이지만 작은 소망들은 그렇다.
아주 멀리 있는 순간에는 신경이 쓰이고 자꾸 보이지만 앞에 다가온 순간에 눈치를 못 채기도 한다.
떼제베를 타는 순간이 그랬다.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가 그냥 어느 순간 이루어져 있었다.
이루어진 것도 깨닫지 못한 소원들이 삶 속에는 참 많을지도 모른다.
파리를 떠나 스위스로 가는 길은 예뻤다.
스위스의 대자연이라는 콩깍지가 씌어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고 떼제베를 탔다는 실감이 나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날 파리에서 바젤까지 기차를 한번 갈아타고 오는 동안 본 풍경이 마음에 들었던 건 분명하다.
모네의 그림에서 보던 들판이 넘실거린다.
비 온 뒤에 촉촉하게 젖어 든 땅엔 초록한 것들이 선명하게 고개를 든다.
기차 창문에 뿌려진 빗방울은 더욱 선명하게, 빗방울 밖은 흐릿하게 풍경을 흔든다.
창문에는 점묘법으로 그린듯한 풍경이 만들어진다.
사실 여행 전 정한 동선에 의거하면 파리를 떠나 스위스를 여행할 예정이었으나 계획이 좀 변했다.
덕분에 스위스에 가지만 스위스를 여행하지는 않는다.
스위스 하면 떠오르는 알프스의 푸른 것들을 꼭 보고 싶었지만 더 마음에 드는 곳들에서 하루씩 일정을 늘리다 보니 스위스에 배팅 예정이던 칩들을 잃었다.
결국 스위스는 다음 여행지로 가기 전 숙박만 해결하는 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스위스를 스쳐 간 것이 아쉽지는 않다.
머무르고도 미련이 남았던 다른 도시들을 생각하면 의외다.
어쩌면 처음부터 갈 생각이 없었던 걸까?
물론 스위스가 품은 알프스를 제대로 봤다면 달라졌을 것 같다.
하지만 잠시 스친 스위스는 그저 조용했고 특별한 영감을 주지 않았다.
기차역 주변만 맴돌았으니 당연한 감상이지만 역 주변만 맴돌아도 좋았던 도시들도 있던 걸 생각하면 나와 그리 잘 맞는 나라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스위스에서 기억에 남는 것들이 있다.
우선 스와치가 그렇다.
스위스라면 알프스도 있지만 역시 시계!
내가 명품 시계를 탐낼 수는 없지만 스와치 정도라면 하나 노려보고 싶다.
그리니치 천문대에서도 손목시계를 집어 왔던 걸 생각하면 나는 시간에 욕심이 좀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
한식당에 갔다.
혼자 하는 여행 중에 한식당을 찾은 건 이때가 마지막이다.
남는 시간 동안 걷다 우연히 마주친 어느 한식당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식당 한쪽은 작은 마트였는데 처음엔 구경만 할 생각이었으나 그곳에서 이태리타월을 발견하는 순간 한식이 먹고 싶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트리거였다.
너무나 한국적인 그것.
스위스에서 발견하리라 생각한 적 없는 그것.
알프스의 풍경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그것.
이태리타월은 한국을 생각나게 했다.
결국 스위스의 끝은 제육볶음으로 기억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