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매 디지털 노마드의 커피 수혈기
발리는 디지털 노마드에게 왜 그렇게 인기가 많을까?
나는 이 현상이 발리에 좋은 카페가 넘치는 현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본다.
'디지털 노마드'라는 단어가 자칫 잘못하면 노트북 끼고 놀러 다니는 사람으로 보이기 쉽지만 오해받을 여지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노동자'다.
노동자를 굴리는 건 임금과 커피다.
현대 노동자의 연료 카페인을 수혈하는 건 노동 환경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발리엔 이 커피라는 자원이 카페의 형태로 곳곳에 분포해 있다.
술값이 비싼 곳에서는 일할 수 있지만 커피가 맛없는 곳에서는 뿌리내리지 못하는 그들이 바로 디지털 노마드다.
그냥 장황하게 써봤는데 요약하자면 커피라도 맛있게 먹어야 일할 생각이 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발리에 있는 내내 커피 때문에 행복했다.
나는 노란 커피와 빨간 커피 맛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미맹 수준의 미각을 지녔으나 몸에 카페인이 들어왔는지 안 들어왔는지는 기가 막히게 느끼는 카페인 중독자다. 하루라도 카페인 섭취를 멈추면 두통을 느끼는 환자로서 발리의 커피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커피맛을 모르는 나 같은 사람도 한 모금 들이켤 때마다 입을 '0'모양으로 벌리게 만드는 커피를 자주 만났기 때문이다. 어떤 식당이나 카페에 가도 음식이 맛없어서 괴로운 기억은 있어도 커피가 못 먹을 정도라 찡그린 적은 없다.
일단 발리의 커피 값은 한국보다 싸다. 당연한 말을 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발리 물가를 생각하면 커피값은 싼 편은 아니다.
괜찮은 카페에 가면 커피 한 잔에 4, 5천 원 정도까지 가는데 현지식 식사가 천 원 내외임을 생각하면 감이 올 것이다. 물론 로컬 가게에서 타주는 가루 커피는 몇 백 원 정도 가격이면 마실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커피란 노트북 작업이 가능한 콘센트와 화장실을 갖춘 카페라는 공간에서 로스팅한 원두를 이용해 바리스타의 손에서 탄생한 커피를 말한다.
이런 조건에 가장 쉽게 맞아떨어지는 건 사실 프랜차이즈 카페다.
실제로 발리에는 크고 멋진 스타벅스를 비롯한 여러 프차 카페가 있다.
우붓의 왕궁뷰 스타벅스도 유명하고, 데와타 라떼라는 시그니처 메뉴가 있는 지점도 건물이 크고 멋져서 하나의 관광지다.
일명 응커피라 불리는 아라비카는 전 세계인의 인스타 핫플이라 조용할 날이 없다.
일하기엔 최악의 환경이지만 발리에선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 하나도 관광지가 되기 마련이라 한 번은 가게 된다.
하지만 내가 발리에서 가고 싶은 카페는 스타벅스가 아니었다.
조금 더 소박하고 귀여운, 그런데 프랜차이즈에서 내지 못할 커피 맛을 내는 카페.
그런 곳이 필요했다.
그렇게 나는 우붓에서 한 카페를 발견한다.
그리고 열흘 조금 넘는 기간에 그곳의 단골이 될 결심을 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곳에서 내 취향의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나는 평균적인 한국인답게 산미 적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선호한다.
하지만 산미 없이 탄맛을 즐기는 한국인과 달리 서양권에서는 산미 도는 커피를 더 선호한다. 차가우면 커피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정확히 조사한 건 아니지만 내 기준에서는 그랬다.
세계 표준이 산미 있는 뜨거운 커피인 탓에 나도 여행 중엔 커피 입맛을 바꾸고는 한다.
그래서 내가 발리에서 주로 마신 커피는 라떼였다. 산미 강한 커피는 라떼로 먹어야 중화가 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우유를 싫어하고 잘 못 먹는 내가 라떼라니. 이미 여기부터 내 커피 생활은 평소와 다르게 흘렀다.
이건 전부 우붓에서 만난 한 카페 때문이다.
바로 숙소 근처 써니 커피.
테이블도 몇 개 없는 아주 작은 카페는 숙소에서 여행자거리로 나가는 길목에 있었다.
처음에는 우연히 지나다 이상하게 들어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홀린 듯 입장해서 커피를 주문했다. 그 뒤로 우붓에서 머무는 열흘 간 내 임시 단골카페가 되었다.
하루 중 어느 시간이든 커피가 마시고 싶을 때면 일기장을 챙겨 그곳으로 향했다.
숙소에서 오분 정도를 걸어 들어가 문을 닫고 뜨거운 햇빛과 자동차 매연을 억누르고 카페로 들어간다.
오늘은 뜨거운 거? 차가운 거?
고민을 한다.
이것저것 다 먹어본 뒤에는 지정 메뉴를 정했다.
써니커피에서 내 원픽 메뉴는 따듯한 오트밀크 라떼였다.
라떼도 안 먹고, 뜨거운 커피도 안 마시며, 비건도 아닌 내가 오트밀크의 맛을 알아버린 것이다.
여기가 꼭 찾아가 봐야 할 정도로 기가 막힌 커피집이냐고 물으면 그건 절대 아니다.
발리에서 이 정도 커피맛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내게는 이 가게의 조명, 온도, 분위기, 습도 등등이 너무나도 취향이었다.
더 좋은 곳을 발견하기 위해 발품 파는 과정이 귀찮아서 내 맘대로 여기가 최고라고 단정 지은 점도 인정한다.
하지만 노동자에게 커피란 맛만큼이나 접근성도 중요한 법이라 이곳에 매일 갈 수밖에 없었다.
나 같은 사람이 한 둘은 아닌지 한 시간 정도를 앉아 있으면 단골 티가 나는 손님을 꽤 많이 봤다. 어제 먹은 그걸 찾는 손님, 오늘은 이걸 먹어보자는 손님 등등이 나타나서 직원들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나는 아마도 그 풍경이 신기했던 것 같다.
관광지에서 단골이라니!
여태 보았던 상투적인 관광지 하고는 다른 풍경이지 않은가.
파리, 로마 등등이 단골이 필요 없어서 음식을 맛없게 만들 필요 없다는 도시 괴담 따위나 듣던 시절도 있는데 발리에서는 여행자도 단골이 될 수 있었다.
이런 게 바로 장기여행, 한 달 살기의 묘미구나.
같은 곳을 여러 번 갈 수 있는 시간적 권력이 바로 장기 여행의 묘미였다.
그걸 알고는 나도 어설프게나마 단골 카페를 만들고 싶었다.
지금도 내게 우붓은 써니 커피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하루에 카페만 세 군데를 가기도 했지만 시작은 항상 그곳이었다.
첫 커피를 마신다는 건 그곳이 하루의 출발선이라는 뜻이 된다.
시작이 좋아야 하루가 좋은 법.
맛있는 커피로 여는 하루는 기분 좋기 마련이라 나는 써니 커피의 단골이 된 이후로 기분이 좋았다.
커피 한 잔 가지고 별소리를 다한다 싶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현대인에게 커피는 고작 잠 깨우는 구정물이 아니다.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성찰이며, 그날 하루가 어떨지 예언을 내려보는 미신의 영역이 되기도 한다.
좋은 커피를 마실 수 있느냐.
그것이 디지털 노마드, 혹은 장기 여행자에게 끼치는 영향은 크다.
그런 의미에서 발리는 커피를 마시며 일과 여행을 모두 하고 싶은 나에게 아주 쾌적한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