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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붓에서 오붓하게 살기

우붓이 좋았던 이유

by 사십리터

누누이 말하지만 발리는 큰 섬이다.

제주도보다 N배는 크다. 그 넓은 발리에서 내가 가장 꿈꾼 발리는 우붓이었다.

발리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미지, 발리에서 가장 보고 싶은 풍경, 가장 발리 답다고 상상한 그런 곳 말이다.

내겐 우붓이 그랬다.

사실 우붓은 휴양지 발리의 전형적인 모습은 아니다. 그곳엔 바다가 없기에 작열하는 태양 아래 펼쳐진 파라솔 따위는 남의 동네 이야기다.

어쩌면 물이라고 보이지도 않는 그 정글이 가장 발리 답다는 건 다소 모순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곳이 그렇게 발리 같다고 생각했는가? 바다는 없지만 휴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20240720_104946.jpg 발리에선 논뷰 카페 레스토랑이 많다

내가 발리에서 얻고 싶은 건 다른 게 아니었다.

자연, 요가, 명상, 저렴한 물가가 주는 안온한 분위기. 그걸 맛보고 싶었다. 호캉스니 뭐니 하는 그런 세속적인 휴식 말고 영혼의 휴양 말이다.

(물론 그런 걸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그럴 돈이 없었다)

우붓 곳곳의 요가원과 시장에서 파는 싱잉볼만 봐도 그곳에 가는 사람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명확하다.

좀 더 정신적인 걸 원하겠지.

20240723_163446.jpg 외국인을 겨냥한 먹거리도 많다(그들의 종교에서 허락하지 않는 음식일지라도)

지금 생각하면 발리라는 섬에 도대체 뭐 얼마나 대단한 걸 기대했나 싶다.

관광으로 먹고사는 도시는 얼마든지 있고 발리도 그중 하나다.

그저 영화나 드라마로 포장이 잘 된 점이 다른 휴양지랑 조금 다르다면 다를까?

하지만 플라시보 이펙트란 게 무시할 수 없는 효과다.

믿으면 실제가 되는 법.

그래서 나는 발리가, 우붓이 영혼의 안식처라고 믿기로 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믿음의 효과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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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탓에 길가의 개들도 여유로워 보인다


조용해 보이는 이 동네는 언뜻 고요하지만 그렇다고 무공해는 아니다.

관광객이 사랑하는 곳인 만큼 절벽에 논과 카페를 일궈 관광객 주머니를 털어먹는 광기를 보이기도 한다.

허공 같은 정글에 그네를 달아 몇 만 원씩 받겠다는 발상은 또 대체 누가 처음한 걸까.

관광지라는 명성에 걸맞는 호객꾼들의 친절하지만 집요한 시선은 가끔 무섭기도 하다.

대체 난 그곳에서 뭘 했고, 남들은 뭘 보러 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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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 앞에 자리 잡은 omma 데이클럽

우붓 관광은 마음먹으면 하루면 끝나는 다소 별 볼 일 없는 코스다.

몽키 포레스트부터 시내 구경까지 끝내는데 몇 시간 걸리지 않는다.

일명 동부투어로 불리는 사원 투어를 떠나기 가장 가까운 지역이지만 그렇다고 코앞은 아니다.

동부투어를 가려면 n시간이 걸리니 사실상 렘뿌양사원 등은 우붓 생활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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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몇 년 사이 크게 뜬 지프로 가는 바투르산 일출 투어.

얼핏 보면 요란하지만 사실 이것만큼 정적인 투어가 없다. 지프 오르내리는 소리야 요란하지만 해 뜨는 것이야 뭐 소리를 내며 뜨겠는가. 해가 올라오면 사람들이 함성 정도야 지르지만 그게 전부다.

게다가 일출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해라는 게 언제 솟아나는지 기준이 애매한 경우가 많다. 새해 카운트다운처럼 함께 함성 지르고 박수치고 그럴 타이밍은 잡기 힘들다. 고요 속에서 달걀과 차 한 잔 마시며 해 뜨는 것만 기다리는 그 투어처럼 정적인 행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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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부터 일출까지 투어란 투어는 다 했다면?

자, 이제 시작이다.

여기까지 다 마치고도 시간이 남아돌아 아직도 우붓을 기웃대는 당신만이 우붓의 제대로 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시간만 죽이는 지금부터가 진짜 우붓이다.

진짜 우붓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다.

논 뷰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수영도 했다면 이제 정말 할 건 다했다. 이 모든 걸 다 하고도 아직 우붓에 남아 있는 당신은 높은 확률로 디지털 노마드다.

바다도 대형쇼핑몰도 없는 이곳에서 당신이 할 일은 딱 하나.

바로 일.

워킹.

Work!

발리의 모든 곳이 그렇지만 우붓은 유난히 디지털 노마드의 공간으로 기억된다.

20240719_155831.jpg 일기장이나 노트북 들고 가기 좋은 카페가 많은 우붓

볼 건 없지만 경치는 좋아서 머무를 맛은 나고, 물가는 싸다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하다고 느낄 만큼 날씨도 쾌적하다.

일하다 미칠 것 같을 때 달려 나가면 도파민을 채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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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거리에 카페와 식당이 가득하니 밥 걱정 커피 걱정 없이 일만 하면 된다.

새삼스럽게 깨닫지만 놀기 좋은 곳이 일하기도 좋다.

이게 나만의 생각은 아닌지 우붓 곳곳의 카페에서 노트북과 아이패드 들고 다니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우붓이란 지역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코워킹 스페이스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우붓의 특징 1번을 디지털 노마드로 알고 있던 나이기에 우붓은 정말 발리 다웠다.

내가 우붓을 좋아했던 건 놀기 좋아서가 아니라 일하기 좋아서였던 것이다.

여행을 가서 일을 떠올리다니. 경악할만한 결론이지만 거긴 그런 곳이다. 각자의 일상에서 일하는 자신이 경멸스러울 정도로 머리가 터지기 직전에 뜨거운 열기로 머리를 식히러 가는 그런 곳이다.

20240725_144415.jpg 가끔 땡볕을 걸어 먹으러 가던 천 삼백 원짜리 국수

반대로 말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최악이란 뜻이다.

실제로 내가 보낸 우붓 사진을 보고 무슨 정글 같다며 비호감을 표한 지인도 있었다. 난 그 정글 같은 모습이 좋았던 건데 세상엔 그런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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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을 감내하기 싫은 사람에게도 우붓을 추천하지 않는다.

발리 다른 지역보다 한 뼘 더 불편한 곳이 우붓이다. 우붓 메인 도로의 복잡함은 몇 번을 지나가도 혀를 내두르게 된다.

공항에서 모든 여행 일정을 책임져줄 것처럼 굴던 그랩은 우붓 일부 지역에서는 이용할 수 없다. 로컬 택시 기사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거대 자본 그랩을 받아들이지 못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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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마을이라는 말 답게 길을 걷다 독특한 풍경을 보게 된다

바로 이 불편함이 바로 우붓 여행의 특징 아닐까.

관광객이란 이름으로 찾아오는 외부인에게 모든 걸 다 내어줄 것처럼 친절하게 굴지만, 한 귀퉁이에서는 고집스러운 면모를 버리지 않아서 그게 차별점이 된다.

관광객이 아무리 많이 찾아도 인구가 적으니 초대형 쇼핑몰 같은 시설은 들어오지 못한다. 번화가가 아닌 논, 정글 속으로 들어갈수록 고급 리조트와 숙박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은 우붓에서 최첨단을 달리는 신식 여행이 아닌 안락한 구식을 찾는다.

20240723_170831.jpg 한적한 골목을 걸어 다니기만 해도 좋은 우붓

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하기 위해 가는 관광지.

참 좋은데 왜 좋은지는 모르겠는 곳.

모순보다 말이 안 되는 문장이 우붓의 기묘한 정체성이다.

20240723_180924.jpg 우붓 숙소 강아지, 우붓에서 얘처럼 지냈다

우붓, 나에겐 참 오붓했던 그곳.

믿음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작은 마을.

우붓.

차분하게 미쳐 있는 그곳.

우붓.

콩깍지 하나 끼고 봐야 매력적인 그곳.

나는 네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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