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는 발리가 아니다
'리', '리', '리'자로 끝나는 말은?
발리, 길리.
대충 적당히 연관 있어 보이는 이름이다.
그래서인지 길리가 발리의 지역 명칭인 줄 아는 사람이 많다. 발리가 인도네시아의 한 섬이라는 걸 자꾸 까먹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둘은 엄연히 다르다.
얼마나 다르냐면 종교가 다르다. 종교가 다르다는 말이 얼마나 다르다는 뜻인지 알 사람은 알 것이다.
종교는 문화권을 나누는 훌륭한 기준이고 척도다. 길리와 발리 두 섬에서 당신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은 전혀 다르다.
이렇게 두 섬이 다르다는 걸 강조하고 들어가는 이유가 있다.
사실 하루 이틀 겪어서는 두 섬의 차이점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음식이나 여러 가지 면에서 발리와 길리는 똑같은 부분이 많다.
한국인에게 길리는 발리에 간 김에 함께 들리는 곳이라는 인식이 크기 때문에 더더욱 같은 곳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래도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길리이니 두 섬의 다른 점을 찾아보도록 하자.
길리는 발리에서 배를 타고 가면 나오는 또 다른 섬이다.
발리도 섬이지만 발리라는 이름 자체가 국가 명처럼 느껴질 정도로 유명하고 규모도 커서 섬이라는 생각이 별로 안 들지만, 길리는 다르다. 일단 배를 타고 들어가는 과정부터 섬이라는 체감이 확 난다.
한국에서는 한 예능 때문에 유명해졌고, 그전에는 서양 관광객들 사이에 입소문이 자자했던 섬이다.
배를 타고 들어가니 멀미 때문에 길리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멀미 때문에 고생하고 배에서 토하는 사람들도 있다.
들어가는 과정부터 진이 빠지는 이 섬에 사람들은 왜 가는 걸까.
발리만 다니기도 바쁜데 여긴 또 뭘까.
발리에서 했던 고민이 길리에서 다시 시작된다.
우선 이 섬의 가장 큰 특이점은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없다는 점이다.
매연을 뿜는 교통기관이 다니지 못하도록 제한하기 때문에 젠지 세대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 시대에도 마차가 다닌다.
발리에서 차와 오토바이에 치이고 교통체증에 갇혀 지옥을 경험하다 길리로 넘어오면 숨을 크게 쉬게 된다.
발리에서 날아드는 매연 따위는 바다에 가로막혀 들어오지 못하는 이 섬의 공기는 꾸따에서 멈췄던 내 숨통을 다시 트게 했다.
물론 기계 대신 동물을 쓰는 게 맞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그리고 또 다른 특이점.
길리엔 거북이가 산다.
물속에 용궁이라도 있는 것인지 거북이들이 섬 주변에 끊임없이 마실을 다닌다.
바다에 들어갔을 때 열대어만 봐도 신기한데 꼬부기, 어니부기, 거북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확실한 차별점이 있으니 여행자들 사이에 입소문이 날만하다.
길리라는 이 섬은 자전거로 한두 시간, 걸어서도 몇 시간 정도면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규모다.
이렇게 작은 섬에 관광객이 바글거리니 온 섬이 하나의 거대한 리조트같이 느껴진다.
어지간한 장소에서는 바다가 다 보이니 어떤 숙소에 머물러도 프라이빗 비치가 있는 것 같다. 숙소에서 바다까지 한 뼘이고, 온통 관광객 투성이니 다들 옷을 안 챙겨 입는다. 웃통을 까고 다녀도, 수영복을 입고 돌아다녀도 상관없다. 만약 이 섬에서 정장을 빼입고 다닌다면 그 사람이 가장 이상해 보일 것이다.
그래서 길리 거기가 뭐 그렇게 지상낙원이었냐 묻는다면... 관광객 입장에서는 Yes.
내가 섬의 주민이었다면 좀 달랐을지 모르겠지만 어디까지나 스쳐가는 한 사람이었기에 내겐 파라다이스가 맞았다.
자, 그렇다면 이 섬에서 내가 뭘 했기에 그렇게 좋았을까.
길리에서 일주일 정도를 머무르는 동안 이 섬에서 내 일상은 다음과 같았다.
일어난다.
주섬주섬 래시가드를 챙겨 입는다.
허리에서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낀다.
전날 선크림을 꼼꼼하게 바르지 않은 탓이기 때문에 구석구석 선크림을 바른다.
하품을 하며 바다로 나가는 길에 고양이를 발견하고 혼자 인사한다.
골목에서 빠져나와 곳곳에 늘어선 가판대에서 오리발을 하나 빌린다.
바다를 노려보며 산책을 하다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 있으면 스노클링 마스크를 쓰고 입수한다.
그곳이 거북이가 나타나는 곳이란 뜻이기에.
물속을 헤맨다.
물고기 떼가 휩쓸고 가는 모습에 넋을 놓고 잠시 뒤면 거북이가 나타난다.
귀여워한다.
각종 수중 생물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파도를 휩쓸고 가다가 정박한 배에 머리를 부딪힌다.
조금 아파하면서 물에서 나와 밥을 찾으러 간다.
배가 부르면 일기장을 들고 전망 좋은 카페를 찾아간다.
노을을 보며 오늘도 하루가 끝나감을 느낀다.
우울증을 잠시 미뤄두고 행복을 느낀다.
놀고먹었단 말을 길게 해 봤다.
일상을 이렇게 보내니까 당연히 천국이다.
이 모든 건 전부 길리 아닌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길리에서 하는 게 제일 어울렸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른다.
그냥 그곳의 분위기가 좋아서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누군가는 소음이라고 짜증 내는 아잔(이슬람교 사원에서 하루 다섯 번 울리는 기도 소리)도 음악처럼 느껴지는 걸 어쩌겠는가.
고양이를 싫어하는데 길가에 누워 있는 고양이가 좋은 걸 어쩌겠는가.
정전이 되는 순간에도 창밖에서 들리는 마차 소리가 정겹게 느껴지는데 어쩌겠는가.
대한민국 내 집 앞에서 벌어졌다면 소음이고 짜증이었을 모든 일이 낭만으로 여겨지는데 좋아해야지 어쩌겠는가.
하지만 여기서 여행 이상의 의미를 찾고 싶냐고 묻는다면 NO.
편의시설은 고사하고 생필품 하나 사기도 힘든 그 섬에 평생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내가 툭하면 전기가 끊어지는 섬에 오래 머무르긴 무리다.
내 삶과 모든 면에서 반대였기 때문에 그 섬이 좋았던 것이다.
일상의 편리함을 타협 가능한 정도로만 누리면서 평소와 완벽하게 다른 하루를 살고 있다고 나를 속였다.
실상 수도와 전기까지 인류의 문명이란 문명은 전부 누린 주제에 어디 오지에 왔다고 착각을 하며 내가 특별한 상황에 처했다고 세뇌하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며 일주일 정도 넋을 놓고 있기에 그렇게 좋은 곳이 없다.
그래서 나는 온 힘을 다해 그 섬을 있는 동안만 사랑했다.
즐길 수 있는 최대를 즐겼다.
바다에 나가 사롱을 펼쳐두고 햇빛과 파도를 동시에 누리며 책을 보다가 친구 대신 거북이를 찾아 바다에 들어가고, 차 없는 길을 하염없이 걸어 노을을 보러 갔다.
길에는 매연이 없고, 바닷속에 용왕님이 살고, 바깥과 단절되어 있다.
아틀란티스가 물에 가라앉았다 다시 튀어나왔다면 바로 그곳이 아닐까.
아틀린티스와 길리의 공통점은 바로 둘 다 바닷속에 가라앉았다는 점이니까.
길리의 진짜 풍경은 보이는 곳에 펼쳐지지 않는다.
스노클링과 다이빙으로 보는 바닷속이 진짜 길리다.
스노클링 경험이 많은 건 아니지만 길리는 정말 좋은 환경이다.
배를 타고 주변 바다로 나가는 투어도 많지만 구태여 돈 주고 할 필요가 없다.
그냥 들어가기만 해도 거북이를 볼 수 있다.
초보자인 내가 바다에 들어가자마자 거북이를 발견할 정도니까.
거북이만 유명하지만 거북이를 찾는 중에 보는 다른 물고기와 풍경도 아름답다.
기본적으로 물이 예뻐서 햇빛이 스며드는 수면만 보고 있어도 환상적이다.
이렇게 땅 보다 물이 아름다운 곳이니 물놀이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 섬은 최악일 수도 있다.
길리의 풍경은 보이는 곳에 없다.
바다 저 아래, 그리고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그러니 당신이 길리에 간다면 눈이 아닌 오감으로 즐기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