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의 행복이란?
창밖에서 들리는 마차소리에 잠에서 깬다.
물 한 모금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청명한 하늘이 보인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숙소 앞 골목을 보며 오늘은 동쪽으로 갈지 서쪽으로 갈지를 생각한다.
동쪽으로 마음먹었으니 배가 고프기 전에 수영복을 챙겨 입고 이제는 익숙한 거북이 벽화 골목을 지난다.
방금 지나친 사원의 담벼락에서 느껴지던 한적함은 어디로 사라지고 시끌벅적한 항구 근처 풍경이 보인다.
캐리어보다 배낭을 선호하는 각국 여행자들이 걷거나 마차를 타고 각자의 숙소로 향한다.
그들과 반대로 걸어 뛰어들기 좋은 바다를 발견한다.
아, 오해는 말자.
한국이었다면 우울증 환자가 뛰어든다는 건 자살을 암시하겠지만 이곳은 길리.
지상낙원의 짭퉁 정도는 되는 섬이다.
나는 최소한 이 섬에서 죽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바다에 쏙 들어가면 저승사자 대신 용왕님은 만날 수 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큰 거북이를 발견할 수 있을지 기대하며 거북이를 따라 팔을 내저어 바다를 가른다.
오리발에 들어온 거친 모래가 거슬리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
거북이는 물론이고 각종 바다 생물과 마주치다 보면 큰 파도가 넘치고 바닷물을 먹게 된다.
소금기 가득한 물맛을 보면 배가 고파진다.
그대로 바다에서 나와 자전거와 충돌할 뻔한 위기를 거치며 나와서 마음에 드는 카페로 들어간다.
수영복 차림 그대로 앉아도 상관없는 이곳은 길리.
매우 인상을 쓰며 '흠, 여행자들한테 팔아먹는 음식 가격은 한국과 다를 바 없군'라고 외치며 그럴듯해 보이는 브런치 메뉴를 하나 주문한다.
전 세계 어딜 가도 참을 수 없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이켜다 다리가 가려워서 내려다보면 고양이 한 마리가 제 맘대로 들어와 어슬렁대고 있다.
넌 누구냐고 묻는 소리는 때마침 지나가는 마차의 다그닥 거리는 소리에 가려 고양이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해양생물에 이어 육지생물을 구경하며 느긋한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간다.
바다에서 골목 2개만큼 들어오면 나타나는 2층짜리 건물의 맨 마지막 방에서 뒤늦게 몸에 묻은 짠 기운을 씻어내고 침대에 눕는다.
정오를 지난 길리의 하늘은 뜨거운데 에어컨이 시원치 않다.
일기장을 들고 나와서 길리에 얼마 없는 에어컨 나오는 카페를 찾기로 한다.
하지만 막상 나오니 오늘도 에어컨보다는 바다 바람 들어오는 항구 앞 카페가 더 마음에 든다.
음료 한 잔을 시키고 일기장에 헛소리를 쓰고, 노트북을 꺼내 일하는 척도 좀 하다 보면 해가진다.
아무래도 오늘은 서쪽으로도 가봐야겠다.
'탁' 노트북을 접고 서쪽으로 걷는다.
자동차도 오토바이도 자전거도 필요 없다.
걷고 또 걷는다.
아, 이런.
마음에 드는 풍경 앞에 자꾸 멈춰 섰더니 벌써 해가 넘어가고 있다.
야자수, 닭, 말을 구경하며 느긋하게 걸으면 서쪽 바다가 나온다.
한낮에 오면 데어 죽을 것 같더니 시간 좀 지났다고 노을이 선선하게 지고 있다.
예쁘다.
나는 그런 길리가 너무 예뻐 결국 울컥한 마음이 든다.
고작 며칠 만에 좋아졌고, 고작 며칠이면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좀 아쉽다.
이런 게 길리의 하루였다.
이렇게만 말하면 내가 무릉도원에 살았던 것 같지만 당연히 길리가 불편한 점도 있었다.
운이 나쁘면 전기와 수도가 끊긴다던가 가는 길 자체가 험하다거나 기타 등등의 단점은 굳이 내 손으로 기록하지 않겠다. 이미 기억이 미화된 지 오래라 숱한 불편함은 휘발되었다.
하지만 단점이 있는 걸 인식하고도 당신이 길리에 간다면 어서 빨리 세 가지를 찾아야 한다.
-맛집
-거북이
-행복
셋 다 있다는데 내 눈에는 안 보이는 수가 있다.
이게 좋대서 왔는데 못 보는 순간 실망하게 되니 잘 찾아보도록 하자.
일단 첫 번째로 찾아야 하는 건 맛집.
길리에 맛집은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뛰어난 맛집이 존재할 수 없는 구조다.
길리는 작은 섬이라 식당 자체가 적고 관광지라 맛도 다 비슷하다. 걸어서 섬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섬에 식당이 뭐 그렇게 많겠는가. 수가 적으면 경쟁이 안 되니 대단한 맛이 나지도 않는다.
대신 관광객을 위한 시설이라 가격이 비싸니 못 먹을 정도로 맛없는 곳도 드물다.
대부분의 식당이 보통의 맛을 팔고, 유별나게 맛없는 식당은 있어도 안 가면 후회한다 싶은 맛집은 없다.
좋게 생각하면 아무 데나 가도 비슷하니 맛집 검색한다고 애쓰지 말고 시간도 쓰지 말고 눈에 보이는 곳으로 가면 된다.
그래도 이렇게 작은 섬인데 한식당도 있고,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몇몇 식당이 있어서 맛집 정보는 넘치니 굶을 일은 없다.
만약 에어비앤비로 주방 딸린 숙소를 구했대도 음식 해 먹는 것도 어렵다.
맛집보다 식재료 구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길리는 대형마트가 아니라 마트조차 없는 곳이기에 작은 구멍가게에서 파는 몇 가지 재료로 약소한 밥상을 차려야 한다. 길리에 들어오기 전에 모든 식재료를 가지고 오지 않는 한 요리도 어려운 환경이다.
그래도 부족한 식재료 대신 바다에서 부는 소금기 섞인 바람, 햇빛이 노을로 변하는 순간을 달걀노른자처럼 얹고, 스노쿨링 중에 본 풍경을 자린고비처럼 떠올리며 먹으면 어지간한 건 다 먹을만하다.
쉽게 말해 미슐랭 맛집 기대하면 실망할 테니 그냥 맛없어도 아무거나 기분 좋게 먹으라는 뜻이다.
두 번째로 찾아야 하는 건 거북이.
거북이를 보려고 배를 빌려 근처 섬까지 가는 투어를 많이 하던데 안 해도 볼 수 있다.
나도 처음엔 배를 알아보려다 첫날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바다에서 10분도 안 걸려서 거북이를 발견한 뒤로는 돈 들여 먼바다로 나갈 필요성을 못 느꼈다.
사실 아주 먼바다로 가는 것도 아니다.
돈 주고 배 탄 사람이랑 혼자 헤엄친 나랑 같은 곳에 멈추게 되는 수도 있다.
물론 물이 무섭거나 다른 생태계도 궁금하다면 멀리 나가는 게 맞지만 나는 온전히 나 혼자 헤엄친 자리에서 내가 원하는 만큼 바다를 들여다보는 게 더 좋았다.
세 번째로 찾아야 하는 건 행복이다.
누군가는 말하겠지.
길리가 그렇게 좋다면 찾을 필요도 없이 가자마자 행복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그러니 거기가 뭐가 좋은지 당장 3줄로 요약해서 말하라고.
하지만 행복이란 건 사실 돈이랑 비슷한 속성이 있다.
내가 노력해서 쟁취해야 하는 면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길리는 하나도 특별하지 않다.
그냥 내가 좋다고 들어서 기대하고 여행을 갔으니 그렇게 느껴지는 것뿐이다.
누군가에겐 고향이고, 주거지고, 떠나고 싶은 답답한 섬일 것이다.
그런 섬이 당신에게 행복을 떠먹여 줄 것이라고 허황된 꿈을 꾸지 말자.
행복은 쟁취하는 것이다.
가봤더니 별로더라, 다들 왜 가냐, 누가 좋다고 해서 속았다.
그런 말로 애써 즐겁게 놀다 온 사람 기분까지 망치지 말자.
경험상 맛집보다 거북이가, 거북이보다 행복이 더 쉽게 찾아졌다.
하지만 나와 정 반대의 경험을 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이건 온전히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기에.
사실 이건 꼭 길리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불만에 가득 차서 툴툴거리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누군가는 발리의 교통체증을 보고 학을 떼며 최악이었다고 하겠지.
길리의 위생을 들먹이며 그딴 후진 곳을 왜 가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
어디 동남아뿐일까.
유럽여행을 다닐 때도 오만상을 쓰며 짜증 내는 사람들이 있다.
폼페이 투어에서 같이 밥 먹을 때 이딴 걸 먹게 하는 가이드가 잘못한 거라고 멀쩡히 먹고 있는 다른 사람들 식사까지 방해하던 그 남자분은 평소 뭘 먹는지 궁금하다. 유럽에 실망했다며 풍경에 만족하는 다른 사람들 기분을 망치더니 지금쯤 한국에서 만족하고 있을지 궁금하고, 그때로 돌아간다면 대체 유럽에 뭘 바랐기에 고작 여행을 하면서 실망까지 했는지 묻고 싶다.
여행을 여행으로 즐길 줄 모른다면, 그 나라의 '다름'을 '후짐'으로 받아들이고 불평한다면 천국에 간들 즐거울까.
내가 길리는 지상낙원으로 느낀 건 내가 그 섬의 온도, 습도, 분위기를 내 멋대로 거를 줄 아는 필터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혹시 당신이 굴러들어 오는 행운을 바라고 길리에 간다면 차라리 로또를 사러 가는 게 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섬에 간다면 꼭 세 가지 모두를 찾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