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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며 불만을 가득 품었다

평균 지상주의의 표본형이었던 나

by 준규네 홈스쿨


대학을 졸업했다.

건축 전공자들이 이름 들으면 알 법한 대형 설계사무소들에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내보았다. 평점 3.25 정도의 무난한 졸업성적, 눈에 별로 띄지 않는 수준의 디자인 감각을 갖춘 어정쩡한 대학 졸업생이었던 나는, 내 눈에 차는 회사 입사가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졸업 후에야 알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처럼 실력이 변변 치 않으면 석사과정이라도 들어가서, 교수님 학생으로 추천이라도 받아야 그나마 가능성이 조금 생기는 일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유학도 가고 싶고,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석사과정 할 형편이 안되니 빨리 취직해서 돈 벌었으면 하는 부모님 의향대로 더 공부하겠다는 욕심을 부리지도 못했다. 솔직히 되내어 보면 그만큼 공부에 열정적이었거나 진지하지도 않았었고, 학문에 원대한 뜻이 있는 학생도 아니었다. 실력 좋은 직원을 뽑아야 하는 그들의 눈은 누구보다 정확했다. 나는 그저 중간, 회색 같은 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크게 부족하지도, 크게 눈에 띄지도 않는... 그런...


당시에는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면 대학 4년 공부하며 그 시간에 몰입해 최선을 다했던 적은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대한민국 표준 지상주의의 적당한 표본이라는 표현이 적확할 것 같다. 그저 성적이 웬만큼 나오도록 뭐든 최선을 다하는 척, 그야말로 적당히 했던 것 같다. 어리석게도...

건축공부를 하며 나만의 가능성을 키워놓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그저 나는 적당한 열정과 고만고만한 실력을 갖춘 보잘것없는 학부 졸업생에 불과했다. 당연히 그 수준으로는 내가 들어가고자 했던 설계사무소의 높은 분들 눈에 띌 리 만무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내 눈에 들어오는 설계사무소에서 일하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마땅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몰랐다. 그저 세상 탓으로 돌리기에 바빴다.

큰 학문의 뜻이 있는 친구도 아니고, 학부 때 그리 열심히 하지 않아 보이던 친구들이 당연스레 대학원에 진학하는 모습이 의외였고 그저 부러웠다. 나는 그러하지 못하는 것이 부모탓이라고만 생각했다. 사실 공부라는 것이 본인이 열렬히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어떤 방법으로든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때는 지레 포기했고 저항심만 가득했다. 시멘트공장 노동자로 일하시며 자식 넷 키우느라 허리가 휜다며 술로 달래시는 아버지를 보며 감사하기보다는 분통 터질 때가 더 많았고, 수학 과외를 틈틈이 하면서도 대학생활 내내 쪼들리는 생활이 힘들 때가 더 많았다. 그렇게 나는 넉넉하지 못한 부모를 향한 알 수 없는 원망을 마음속 깊이 차곡차곡 쌓아 숨긴 채 직장생활을 하겠노라 마음먹게 된 것이었다.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사무실들은 모두 떨어지고 구직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곳에 이력서를 쓰고 간간이 면접을 보면서 눈높이를 낮추며 내가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작은 인테리어 사무실에 취직해 1년여간 일하면서 내 직장생활은 시작되었다. 작은 사무실이라 일이 들어오지 않을 때는 하루 종일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업무시간을 때우면서 생각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내 마음속엔 '나는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내가 이런 데서 일하려고 4년씩이나 아니 16년을 공부했나' 하는 마음이 목까지 차오르곤 했다.

결국 다니던 사무실을, 공부를 더하고 싶다는 핑계를 대며 나왔다. 통장에 돈은 없었고, 드라마에서 나오는 주인공처럼 홀연히 유학길에 오르는 그런 장면을 펼치기에는 너무나 가난했고 아무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결국 돈을 모을 때까지, 영어시험, 입학시험을 준비하기 전까지는 다시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보다 조금은 버젓한 직장이라고 생각해 들어가 보았지만 실상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뜰리에 규모의 작은 사무실에 소장님 하나 보고 일하겠다며 들어갔지만 6개월 정도 힘들게 일하다 더 이상은 일이 없어 다시 인원정리가 되어 나와야 했다. 그다음 들어갔던 곳은 대형 설계사무소라고 안심하고 입사했지만 들어가서 보니 사무실 이름만 빌렸지, 사무실 층 한쪽 편에서 자리잡기를 하고 있는 프로젝트 팀이었다. 빌딩 두 개층 전 직원이 월요 전체회의를 할 때면 사외 상무님을 포함한 우리 팀 다섯 명은 이방인처럼 회의에서 열외 된 채로 자리를 지켜야 했다. 결국엔 이곳조차 팀이 와해되며 직장을 나와야 했다. 이후 첫 직장의 상사분의 소개로 두서너 군데에서 1~2년씩 더 일을 하게 되었다.

지금 와 돌이켜보면 마지막 직장이었던 곳에서도 여전히 내 영역을 찾지 못한 채 일하는 척만 하며 일 년을 넘게 보냈던 것 같다. 상사들이 보기엔 열심히 하는 직원이었지만 내 마음속에 내 직장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못하며 시간을 보냈으니 상사 중 까다롭고 질책이 심한 사람을 만나면 한없이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새벽까지도 일중독으로 잠 못 이루는 상사 덕에 수시로 업무지시 전화를 받으며 스트레스가 쌓여가던 즈음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신혼 초임에도 새벽까지 전화를 해서 일처리를 지시하는 상사 덕분에 결국엔 임신과 동시에 좋은 핑곗거리를 찾아 퇴사를 하고 이후 아이를 방패 삼아 경단녀로 15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이 직장, 저 직장 옮겨 다니며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서울 하늘 아래 원룸 전세를 대여섯 차례 옮기며 그 어떤 부당한 처사에도 힘없이 나와야 하는 세입자의 설움에 성이 날 때로 나있었던 나에게 결혼은 하나의 안식처 같았다. 그리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 같았다. 오롯이 희망 가득한 시간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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