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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는 두 엄마가 있었다

내가 경험했던 엄마와는 다른 버전의 엄마로 살아야 하는 21세기

by 준규네 홈스쿨


아이를 막상 낳고 보니, 책을 통해 접하는 엄마의 모습은 내가 경험했던 엄마와는 사뭇 달랐다. 마치 외국영화에서나 볼법한 풍경들이 요구될 때가 더 많았다. 무릎에 아이를 앉혀 다정스레 동화책을 읽어주는 엄마 모습은 이미 당연시되고 있었고, 아이의 행동은 단호하게 잡아주되 감정적으로 아이에게 화를 내어서는 안된다고 책에는 쓰여 있었다. 이성적이면서도 따뜻한 그런 이상적인 모습이 일종의 21세기 엄마상? 같았다.


그에 반해 내가 겪었던 부모는 학교 보내는 것이 교육의 전부였고, 아빠 때문에 속상하거나 화난 날은 늘 엄마 입에 '마한년들'이라는 수식어가 욕처럼 붙어 따라다녔고, 그런 날이면 눈치껏 집안 청소를 하고, 밥을 하고, 동생을 돌봐야 했다.

[마한-아주 못된이라는 강원도 방언]


책에서 요구하고 있는 21세기형 엄마는 내가 어디서도 겪어보거나 경험해보지 못한 엄마였다. 그래서 더 어려웠고 때론 서러웠고, 버거울 때가 더 많았다.


나의 부모로부터 그렇게 길러졌더라면 그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사랑의 마음을 담아 그대로 내 아이에게 전하면 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우리 세대는 우리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생경한 방식으로 자식에게 사랑을 표현해야만 했다. 아이와 정서적으로 교감을 하고,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맺고 유지해야 했으며 수면 교육까지 해야 하는 온갖 정보들 앞에서 무기력해질 때가 더 많았다. 진짜 엄마가 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엄마 흉내를 따라 가느라 늘 허덕여야만 했다.


글로 배운 육아라 책에서 본 대로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았고, 시시 때때로 본질은 잊어버리고 방향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아이는 더 고집 불통이 되어 통제가 안 되는 것 같았고, 그럴 때마다 친정 부모님이나 시 부모님께서는 ‘따끔하게 혼내야지’, ‘너무 다 들어주면 버릇 나빠져’와 같은 말씀들로 조언을 하셨고 조금씩 그들에게서 자녀교육에 대한 상의보다는 무관심을 바라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버전의 엄마로 살아 보고자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애를 쓰다보면, 마음 한편에는 내 부모에 대한 아쉬움 내지는 원망이 올라오기도 했다.

허리춤에 인형같은 아기를 가뿐히 안고서 모든 것을 다 갖춘 어느 셀럽같은 모습일 때 보다는 모유 토한 냄새가 진동하는 티셔츠, 아기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배에 찬 아기띠에 땀이 고여, 한겨울 외투가 필요없는 것이 육아의 현실이었다.


예상처럼 쉽지 않은 육아, 책에서처럼 되지 않는 아이를 대하다 보면 내가 하고 있는 양육 방식에 대해 혼란스러울 뿐 아니라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어디인지 조차 잃어버릴 때가 더 많았다. 나에게 어른은 내 엄마, 내 아버님이지만 상의할 어른을 찾을 수가 없으니 길을 잃고 주저앉고 싶을 때가 차고 넘쳤다. 시선을 돌려 남편을 바라보며 기대해 보지만 그도 아빠가 처음인 바쁜 회사원일 뿐이었다. 남일 이야기하듯 어깨 너머로 ‘너는 너~무 아이들 위주야, 너무 유난스러워’와 같은 말을 하거나, 심지어 아이에게 보내는 공감과 사랑을 남편인 본인에게도 해주었으면 하는 간절함과 시기심을 보낼 때가 더 많았다.


결국 기댈 곳은 책 밖에 없었고, 다시 책을 읽으며 실수하거나 어설픈 엄마가 되지 않으려 엄마 공부를 하고 다짐을 무수히 해야만 했다. 그러나 여전히 난, 유년기에 내가 경험했던 부모와 내가 행해야 할 부모의 이름이 너무나 달라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 경험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1세기 엄마는 그렇게 그 길에 다시 외롭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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