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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규네 홈스쿨 Apr 02. 2021

기질이 센 아이를 내 틀에 가두려 했다

내적 자아를 성장시킬 수 있는 내 인생 유일의 기회


아이를 낳고 감당이 안 되는 상황들을 시시각각 마주하며 부모로서의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매 순간 느꼈다. 육아란 일상은 체력적으로 나를 한계에 다다르게 하면서 동시에 정신적으로도 영혼이 탈탈 털리는 느낌이었다. 뭔가 핀트가 엇나간 느낌이 수없이 들었다. 나의 예상과는 엇나가며, 아이의 과하면서도 충동적인 행동들은 나를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했고, 좌절하게 만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적어도 아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아이의 당혹스러운 행동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부모님께 여쭤봐도 '너무 다 받아주면 버릇 나빠져'라는 대답으로 일축되곤 했다.


발달 상의 원인이든, 양육 방식에서의 잘못이든 그 이유를 찾아야 해결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가볍게 쓰인 육아 서적에서부터 나중에는 교육 전문 서적들까지 탐독하게 되었다. 웬만큼 아이가 느슨하게 반응했더라면 중간에 슬쩍 책을 놓았을 텐데, 아이의 행동은 끊임없이 나를 불안감으로 이끌었다. 혹시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아이인가? 소아 정신과를 가봐야 하나? ADHD인가? 충동성 장애가 있는 아이인가? 쌀통의 쌀알 개수만큼이나 애태우고 조마조마해야 하는 순간들이 너무나 많았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예상대로 되지 않는 아이를 마주하며 일종의 무지함에서 오는 불안감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교육서들을 탐독하던 중 가장 눈에 띈 대목이 있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이 된 후 웬만해서는 사람이 바뀌지 않지만,

자신의 내적 자아를 대면하고 고칠 수 있는 기회는
유일하게 자식을 키우면서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몇년 안된 경험이었지만 충분히 납득이 되는 소리이기도 했다.


이래도 힘들고, 저래도 힘든 육아라면 이 기회에 나도 한번 나의 내적 자아를 고쳐보자는 마음을 먹었던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매번 나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고 애쓰고 있는데도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아이가 잘못이 아니라면 '혹시 나?'라는 생각이 조금씩 올라올 무렵이었기 때문이었다.


나 스스로에게 마음에 안 드는 구석, 누구나 하나쯤은 갖고 있기 마련이고 나 또한 잘라 내버리고 싶은 부분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그 글귀가 더 눈에 띄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힘든 시간을 지혜롭게 극복해보자는 더 큰 이유가 필요했고 절실했다.


주변을 돌아보면 남의 아이들은 참 쉬워 보였다. 예쁘게 부모 손잡고 걷고, 위험하다고 하면 바로 눈치 보며 관두고, 부모님 지시에 따라 얌전히 행동하고, 무언가 행동하기 전 부모에게 항상 물어보는 아이들 천지였다. 그에 반해 내 아이는 사사 건건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걸음마를 떼고 부터는 손은 늘 뿌리치며 거리를 종횡무진하려 했고, 위험하다고 하면 엄마를 때리거나 화내기 일쑤였고, 부모인 내가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이미 사고를 치는 민첩스러움으로 늘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거의 외식이라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지만 어쩌다 친구네와 함께 식사라도 한번 하려면 예상치 못한 돌발 행동에 기운이 다 빠지고 말았다. 주차장에서 친구네 가족이 아이들을 데리고 식당 안으로 다 들어갔는데도 우리는 주차장에 앉아 한걸음도 떼지 않는 아이를 속이 터지는 마음으로 바라봐야 했다. 어찌 보면 고집이 센 아이 같기도 하고, 자기주장이 강해서 그런 것도 같았고, 본인의 흥미나 관심 있는 것을 방해하거나 간섭받을 때 기질적으로 예민해서 더 까칠하게 구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로 인해 난처한 상황이 올 때면 A와 B, 둘 중 어떤 리액션을 해야 아이도 덜 힘들고 상황도 덜 번거로울 수 있을지 늘 옵션들을 두고 택해야만 했다. 모든 상황들에 누군가 행동 매뉴얼이라도 준다면 전 재산을 다 내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청소기를 얼른 밀고 집안 청소를 하려고 하면 청소기를 빼앗고 내던지며 이해 못할 반응들을 보였고, 설거지 하는 도중 자신이 쌓은 블록을 보여 주고자 할 때, 빨리 가서 봐주지 않으면 분노했다. 서운함과 토라짐의 강도가 늘 내 예상보다 셌다. 사실, 청소기 한 번에 다 못 돌리고, 설거지 한 번에 다 못하더라도 '허허' 웃으며 잠시 놀아줘도 그만인 일이었고, '기다려'라고 단호히 한마디면 되는 것을 나부터 한없이 미숙했고 늘 전전긍긍 하고 있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아이로 인해 중단될 때마다 아이를 훼방꾼처럼 바라볼 때가 더 많았고, 웬만하면 '안돼'라는 말을 하지 않겠다며 구구절절 설명들을 늘어놓으며 설득하려 애썼다.


나 또한 두 살짜리 꼬마와 별반 다를 것 없이, 내 기준대로 내 시간에 맞춰 아이가 '착착착' 움직여 주길 바랄 때가 많았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진짜 어른이, 진짜 부모가 아니었던 탓에 아이의 모든 행동들에 까다롭다는 딱지를 붙여놓고, 나를 방해하고 비협조적이라 여기며 나조차 두 살짜리 꼬마처럼 굴 때가 더 많았다.


그때는 몰랐다. 그냥 내 아이만 왜 이렇게 말 안 듣고, 제멋대로 이냐며 답답함만을 키울 줄만 알았다. 말을 잘 듣길 바라는 그 지점부터 이미 나의 출발선이 틀렸다는 것조차 몰랐던 것이다. 내가 지구라면 이 아이는 화성이라는 전혀 다른 궤도를 돌고 있었는데도, 어떻게 해서든 지구의 공전궤도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고만 했다.


책 <교육을 말하다>에서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한다.


올바른 교육은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개인을 길들이는 수단도 아니며,
어떤 이상적인 틀에 아이들을 맞추어 내는 것이 아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모든 일상에서 순조롭고 순한 아이였다면 나는 지금만큼 성장할 수 없었을 것 같다. 물론 여전히 성장하고 성숙해야 할 길이 멀지만...

그래서 아이에게 참 감사하다. 아이가 유순하고 내가 지시하는 대로 잘 따르는 아이였다면, 나는 분명히 살아왔던 관성대로 아이를 바꾸려 들었을 테고, 내가 여전히 모두 옳다 여기며 앞으로도 쭉 그렇게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매 순간 부모와 나는 다르다고 강하게 이야기하고 있었고 본인만의 궤도를 그리려 하는 독립적인 존재였던 것이였다.


우리는 부모가 되면서 내가 어른이라는 생각에 전적으로 부모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이 옳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러한 어른 위주의 의견과 행동들을 아이에게 강요하는 실수를 수없이 저지른다. 때로는 그 강요들이 어른스럽지 못한, 성숙하지 못한 모습으로 아이에게 폭력 아닌 폭력으로 행해지곤 한다. 아이를 단순히 때리고,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만이 우리가 떠올리는 폭력이 아니다.


주 양육자와 영유아기 아이들과의 시간을 들여다보면, 아이들은 어른으로부터 양육이라는 이름 아래 통제당하고, 강제적인 강요를 당하고 있을 때가 너무나 많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것들을 어른들로부터 답습한다.


일례로 어린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만 가 봐도 흔한 풍경이 있다. 놀이터에 데려온 아이가 한 10분쯤 모래를 열심히 파고 있을 때, '그거 그만하고 미끄럼 타자', ' 옷에 흙 묻어, 그만해', '깜깜해지겠다, 그만 들어가자'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모래를 한참 신나게 파면서 몰입하고 있는 아이에게 예고 없이 갑자기 '집에 가자~' 라며 이야기하고, 아이가 바로 손을 털며 일어나지 않는다며 협박의 말들을 쏟아내곤 한다. '말을 안 듣는다, 5분만 더 주겠다, 자꾸 이러면 다음부터는 놀이터에 못 나온다' 등등의 다양한 협박들로 아이에게 으름장을 놓고, 아이가 끝까지 버티는 경우 큰소리로 혼을 내고 끌고 들어가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조차 점점 흔한 풍경에서 사라지고 있을 때도 많지만...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주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힘없고 이 어린 존재를 귀하게 여기는 게 우선이다. 사실 그게 선행되면 매 순간의 행동 매뉴얼 따위는 필요 없을 때가 더 많다. 아이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또 하나의 작은 인격체로 대하려고 하면 이 모래 더미가 지금 이 순간 아이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이 공감의 시작인 것이다.

마치 내가 비싼 고급 레스토랑에서 코스요리를 먹고 있는데, 애피타이저 접시가 치워지자 마자, 남편이 이 정도면 됐으니 그만 먹고 집에 가자는 거와 다를 바가 무엇이란 말인가! 애초에 그렇게 짧은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고급 레스토랑 대신 햄버거 하나로 배라도 부를 일인데 말이다.


그렇게 내가 무의식적으로 아이에게 어떤 행동들을 '가'하고, 그에 대한 아이의 '과'한 반응들을 얻어맞으며 나는 내가 틀렸음을 조금씩 인정해야만 했고, 내가 의식조차 못하고 살아왔던 나의 고약한 구석들을 하나씩 대면하며 바꿔나가려 애써야 했다. 그 시간은 참 더뎠고, 오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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