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옥에서의 삶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공간이 주는 변화 & 장소가 갖는 힘

by 준규네 홈스쿨


나의 경단녀 탈출기와는 무관해 보이지만 어쩌면 가장 밀접할지도 모를 이야기를 하나 하려고 한다. 바로 집에 관한 이야기이다.


비록 아이를 낳고 경력단절녀의 씁쓸한 생활을 하며 그동안 배웠던 공부가 모두 쓸모없이 느껴질 때가 많았지만, 어쩌면 대학에서 우리 부부 둘 다 건축을 전공했던 것이 연유가 되어 한옥으로 이사를 감행할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둘 다 건축 설계에 뛰어났다거나 분야에서 잘 나가는 전공자는 아니었지만 대학에서 공부를 한 후 가장 크게 배운 것이 있다면... 공간이나 장소가 갖는 가치에 대해 좀 더 성숙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다.

Place의 보이지 않는 힘!
그리고
삶에 미치는 그 영향력~

아마도 그런 배경들이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5살 된 장난꾸러기 아들과 함께 한옥으로 이사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겨울의 끝자락, 툇마루 끝에 앉아 조금은 따스해진 볕을 온몸 가득 쏘이던 아이 모습,

주말이면 대문을 열고 마루에 누워 하늘과 바람을 맞으며 자는 달콤한 낮잠,

처마 밑에서 빨래를 너는 내게 노란 고무신을 신고 달려 나와 도와주던 아이,

비가 오면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에 아기 자전거가 젖을 세라 우산을 씌워야 했던 비 오는 날의 한옥,

마당 수돗가에 앉아 시커메진 걸레를 빠는 구정물에 새하얀 벚꽃잎이 떨어져 앉을 때 행복하다는 남편,

처마 밑 빨랫줄에서 하루 종일 햇살을 맞으며 꾸덕꾸덕해진 빨래들,

방에 누워 올려다보는 천정의 서까래들이 마치 노 젓는 배 아래 바닷속에 있는 기분이라던 아이,

다락방을 자기 실험실이라며 온종일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노는 아이 발자국 소리,

봄이면 대문 담장 너머로 지구의 오랜 시간과 딱정벌레를 떠올리게 하는 목련,

가을이면 꼽등이가 마당의 마루 밑에서 찌르르르 소리를 내며 계절을 느끼게 하고,

새벽이면 창덕궁을 날아다니다 기와에 앉았을 법한 새소리로 가득한 평화로운 아침,

시골에서 보내주신 표고버섯을 썰어 마루 한 가득 채반에 널어 봄볕에 말리고,

겨울을 지나며 달콤한 곶감으로 변신할 땡감을 몇 백개씩 깎으며 처마에 매달고 까매지던 손가락,

집을 나서도 한옥 담들과 기와가 가득하고 고궁의 지붕들이 켜켜이 보이는 마을,

길에는 늘 외국인 여행객들의 발이 끊이지 않는 북촌,



이 모든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스며들며 우리 세 가족의 삶을 참 많이도 바꿔 놓았다.




우리 가족이 계속 아파트에 살았더라면 지금의 모습과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문해보면 아닐 것 같을 때가 더 많다.


비록 18평 땅에 자그맣게 지어진 오래된 한옥이었고, 아파트 생활을 하는 친구들의 집에 가보면 널찍한 거실과 프라이버시가 완벽히 지켜지는 넓은 방들, 모기 없는 여름을 날 수 있는 집이 그리워지는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도 놀이터 하나를 두고 평수에 따라 계층이 나눠지고, 층수에 따라 집값이 달라지는 미묘한 분위기들이 풍겨 나오는 곳이 아파트이기도 했다. 집이 비슷하니, 서로를 의식하지 못한 채 닮아가기도 하고 때론 시기하기도 하며 그 안에서 지향점이 비슷하게 서로들 닮아 가는 곳이기도 하다. 지향점이 같으니 누구는 성공했고, 누구는 그만 못하다는 이분법의 논리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툇마루보다 조금 올라온 아이의 키로 본 세상은, 1층짜리 한옥을 3층처럼 느끼기에 충분했나 보다. 마당이 1층, 디딤돌을 딛고 올라가는 마루와 방이 2층, 다락이 3층이라고 했다. (어른들 시선과 기준에서는 당연히 단층 한옥이다.) 심지어 대문 밖 골목도 자기 집이라고 생각했다. 온종일 들락날락하는 장소일 뿐 아니라, 엘리베이터 같은 것 필요 없이 발이 닿는 곳이니 20m 골목길도 다 자기 집이자 자기 놀이터라고 여겼다. 고 정주영 회장이 살았다는 집의 별채 비상 출입구가 우리 집 골목길 한편에 있는데, 아이는 매번 그 큰 집이 부러웠는지, 나중에 어른이 되면 그 집을 꼭 사겠노라고 선언했다. '40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싶어요'보다는 더 마음에 드는 포부였다.


대문은 늘 열려 있었고, 마루에 앉아 커피 한잔 하고 가는 이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아파트에 살던 때는 상상치도 못했던 이들의 발길들이 끊임없이 닿았다. 근처 사는 남편의 대학 후배는 일이 끝난 밤이면 배가 고픈데 밥 좀 없냐며 맥주를 사들고 찾아와 툇마루에 앉아 세상 고민들을 종종 나눴고, 대학 은사님은 고건축 답사 차 창덕궁에 오셨다며 대학생들을 몰고 우리 집 작은 한옥 마당을 가득 채우셨다. 사랑방에 Airbnb로 묵었던 독일 청년은 해마다 우리 집에 묵으며 준규와 레고를 만들고 스타워즈를 보았다. 결혼을 하게 되었다며 여자 친구를 소개했고, 그다음엔 아기를 낳아 함께 오기도 했다. 젊은 부부가 아파트 대신 한옥을 선택한 연유와 그 삶이 궁금해 방송 촬영이나 잡지 촬영팀의 방문이 종종 있었고, 아이들을 데리고 북촌을 방문했다가 전통 체험하듯 한옥을 구경하고파 연락을 해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평소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일이 거의 없던 우리 부부는 예상치 못한 이들의 발길을 맞이하며 피곤할 때도 있었지만, 그 시간이 기회가 되어 소중한 인연들이 지속될 때가 더 많았다. 집이 열려 있었고, ㄷ자 한옥 마루에 마주 앉으면 무릎이 닿을 만큼 작은 한옥이었지만, 마당이라는 공간은 사람을 방어적이기보다는 열려 있게 만들었다. 길에서 마주친 남자 대학 선배에게도 스스럼없이 차 한잔 하고 가시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런 집이었다. 당연히 그런 말들을 입에 올리고,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마당(전이 공간)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더 유연해졌고, 하늘과 햇살을 듬뿍 받으며 더 따뜻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우여곡절 끝에 아이가 학교를 관두고 홈스쿨링을 하게 되었던 것도, 남들과는 조금 다르게 살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들이 보이지 않게 반영되었을 것이다. 홈스쿨링을 하며 사랑방에 묵는 외국인 Airbnb손님들과 끊임없이 함께 지내며 세상과 단절되기보다는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고, 한옥에 살며 첨단 로봇을 만드는 꼬마라는 점이 더 특이해서 영재 발굴단에 아이가 소개될 수도 있었던 것 같다.


예전에 그랜저 자동차 광고 카피에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 그랜저로 대답했습니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표현하고, 나의 경제 수준, 취향 모두를 표현한다는 뜻이었다.


아마 우리 가족도

우리 북촌 작은 한옥에 살아요

라는 말로 우리가 어떤 지향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인지가 표현되었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많은 무의식적인 변화들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나비효과처럼 그 변화의 파장은 예측할 수 없었다.


성냥갑처럼 생긴 똑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비슷한 삶의 지향점을 가지게 되듯, 제각각 다른 집에서 다른 사연들을 가지고 골목길이나 길에서 마주치며 서로의 다른 삶을 공유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다름이 인정되고 질타받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아마도 아이가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서 아파트에 살았더라면 매일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며 이상한 나라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더 자주 느꼈을 것이다. 물론 이곳에서도 그런 일들이 종종 있었지만, 그래도 이상한 모습이 꼭 이상하지 않게 용인되는 곳이기도 했다. 골목길에는 잔소리를 늘어놓는 할머니도 있었지만 정겨운 이웃들이 생겼고, 골목길에서 아이들 웃음소리, 공 차는 소리가 들렸다. 골목길을 걸어 나가는 우리 아들 소리를 듣고 옆집 꼬마는 방 창문을 열어 하루를 넘기기 힘든 소식들을 전하느라 바빴다.


21세기 오늘은 남들과 다른 것이 개성으로 여겨지는 시대이다. 여전히 그 개성이 불편함으로 다가올 때도 있지만, 그 다름 안에서 다른 하루를 보내고, 다른 생각들과 생활들을 하면서 사람은 조금씩 달라진다. 그것이 바로 공간이 주는 힘이고, 장소가 갖는 추억이며 그 시간들을 통해 사람은 저마다의 다른 향기를 풍긴다.


그렇게 오늘도 아들은 디딤돌 위에 놓인 신발을 챙겨 신고, 강아지에게 인사를 하고, 솟을대문만큼 높은 대문은 아니지만 자그마한 한옥 대문을 열어 학교로 향했다. 골목길을 나가 기와지붕들을 눈에 넣으며, 한옥 담장들을 마주하며, 청소년기 이 시간들을 풍경들과 함께 마음에 담으며 학교로 걸어갔을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