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를 하며 넘어야 할 산이, 예상보다 거대한 산이였다는 것을 매번 느꼈다. 행복한 만큼이나 수행하는 기분으로 아이를 키웠지만 나의 일, 직업에 관한 고민은 언제나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때로는 불안감으로, 때로는 무기력함으로...
내 시간, 노력, 그리고 온 마음들을 육아에 갈아 넣는 기분이었지만, 그 어디에서도 나의 이 시간들을 귀하게 이력으로 쳐줄 곳이 없다는 것은 뼈 아픈 현실이었다. 어느 순간 오기가 생겨 엄마로서 지나온 시간들을 경력으로 만들어보자며 <준규네 홈스쿨>을 쓰고 사회로 나가기 위해 발을 내디뎠지만, 그러기 전까지는 오리무중이었다.
3세 신화를 읽은 마당에 내 눈에 찰 리 없는 연변족 아주머니에게 내 아이를 맡기면서까지 워킹맘으로 살기에는 우선 내 직업이 변변하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 일을 하면서도 늘 직장 열등감에 시달렸고, 번듯한 직장이 아니었기에 내가 다시 돌아갈 직장은 안정적이지도, 전문직으로 큰 수입이 보장되는 곳도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따져보면 남편의 일반 공무원 외벌이에 쪼들리는 살림이라 일을 해야 마땅했지만, 나의 부재로 인한 엄마 자리를 메꾸기 위해 내 월급만큼을, 어쩌면 그 보다 더 많은 돈을 낯선 이에게 돌려막기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수 없이 머리로 계산을 해보았지만, 아이의 불안정한 애착을 감내하면서까지 내 월급을 누군가에게 몽땅 안겨 주고, 아이를 맡기는 것은 리스크가 꽤난 큰 결정 같았다.
주변에서는 이런 비슷한 고민들을 되풀이하다 다시 일하며 워킹맘으로 자리를 잡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일과 육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것 같아 보였지만 이면에는 늘 육아, 집안일, 회사, 이 모두가 부족함 투성이라고들 토로했다. 또는 일하러 나갔다가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 시부모님의 도움, 아이의 건강 이 셋 중에 하나라도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결국 '아줌마들은 다 저래'라는 비난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전업주부로 낮시간, 커피 한잔 들고 유모차 끄는 모습이 남들 눈에는 한가롭고 돈 걱정 없는 아줌마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오피스룩을 입고 커피 한잔 들고 가는 여성들을 보며 내 초라한 모습에 심장과 어깨는 더 쪼그라들었다. 점점 더 사회에서 도태되고, 잊혀지는 것 같은 상실감에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회사 다닐 때는 그렇게 싫어하던 회식자리가 그리웠고, 누군가와의 미팅이 부럽기 마저 했었다.
아이의 존재로 인해 세상보다 더 큰 행복과 충만함이 가득 찼지만, 그 충만함 만큼 공허했고 나 자신은 점점 텅 비어 가는 것만 같았다. 내가 무슨 공부를 했었고, 왜 했었는지, 직장에서는 무슨 일을 했었는지, 대학은 나올 필요가 있었나 별의별 고민들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세상과 단절된 채 놀이터와 집 근처 공원을 오가며 하루, 일 년, 5년, 그렇게 팔자 좋은 아줌마의 허물을 쓰고 시간은 야속하게 흘렀다.
이미 주변에서는 어린이집을 보내는 경우들이 꽤 있었고, 육아보다는 차라리 직장이 편하겠다며 출근을 하는 친구들도 적지 않았다. 예전 직장에서도 일하러 나오지 않겠냐고 가끔씩 연락이 왔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고, 결국 모든 것들이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늘 결론은 제자리였다.
심지어 내가 만족할 만한, 번듯하고 폼 나는 좋은 직장에 다니지 않았던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긍정적인 합리화? 까지 했다. 그만 두기 아까운 직장이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었다. 결국 난 나보다 더 좋은 대체 엄마를 구하려는 모험을 감행하기에는 소심했다. 차라리 경제적으로 조금 힘들더라도 아껴 쓰고, 아이 하나 잘 키우자며 조금씩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아이가 6살이 되었고, 처음으로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비교적 집에 오래 있었던 아이였고, 예민한 아이라 유치원 적응이 쉽지 않았다. 건강하지 못했던 아이라 가는 날보다 아파서 유치원에 못 가는 날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나만의 시간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홀가분해진 시간이 좋아, 커피도 마시고, 산책도 하고, 책도 보고, 낮잠도 잤다. 그러나 그것도 몇 주면 충분했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갑자기 헐렁해진 오전 시간,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동안은 아이 핑계라도 대고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뒷걸음질 칠 곳이 없어 보였다. 뭐든 내 인생에 대한 준비가 필요할 것 같았다.
나는 무엇을 잘하는지? 내 직업, 제2의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이 여섯 살 되던 해까지도 숱하게 그런 질문들을 했지만 여전히 안갯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 불편한 시간들을 보내며 두 가지 생각을 했다. 부업으로라도 가계에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것 한 가지와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될 때 쯤에는 내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하자라는 것이었다. 그 생각을 했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지만, 인생의 계획은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글귀들을 라벨 붙여가며 읽었던지라 그렇게라도 나를 다그쳐야 했다. 나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뭐든 해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딱히 시작할 만한 것들을 쉽사리 찾지 못했다.
우선은 아이를 키우며 할 수 있는 부업거리를 찾아야 했다. 퇴근한 남편에게 거의 매일 '나는 뭘 잘하는 것 같아 보여?'라고 물으며 남편에게까지 내 직업을 찾아내라며 징징댔다.
우리 부부는 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북촌에 있는 아주 작은 한옥으로 이사를 와서 살고 있었다. 대지 18평에 아주 아담한 집이었고 이사 온 후 철마다 세간살림들, 옷가지들을 정리하며 계속 비워 나가야 하는 집이었다.
머릿속이 온통 부업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로 가득 찼던 때라 동네를 오가는 외국인 여행객들과 집 주변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한옥 게스트하우스들이 눈에 들어왔다. 두 평이 채 되지 않아, 성인 두 명이 누우면 꽉 차는 우리 집 사랑방을 두고 고민이 시작되었다. 사랑방에는 아주 작은 화장실이 붙어 있었고, 30년 된 까맣고 덩치 큰 영창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뭔가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첫 산이었다. '그래 일단 시작해보자'는 마음으로 집 근처 낙원상가에 연락해 눈물을 머금고 중고 피아노를 떠나보냈다. 팔았다기 보다는 거저 가져가게 해야만 했다. 속이 쓰렸고, 언젠가 큰 집에 살면 후회하게 될 날이 오리라 생각했지만, 결단이 필요했다. 결혼할 때 장만했던 고급 한식 이불을 깨끗이 빨아 목화솜 매트를 넣어 요를 준비하고, 책장들의 책들을 다시 한번 정리한 후 Airbnb 공유 숙박 사이트에 집 사진과 정보들을 올렸다.
뭐든 시작하는데 오래 걸리고, 생각만 하다 마는 성격이라며 스스로를 다그치던 것에 비하면 나름 성공적이었다. 처음이니 저렴하게 올려서, 손님을 일단 오게 해 보자는 요령으로 포스팅을 마쳤다. 금액을 워낙 파격적으로 올려서인지 문의 메시지들이 하나둘씩 오기 시작했다. 구글 번역기와 네이버 사전을 동시에 띄워놓고, 영작을 더듬더듬해가면서 실시간으로 오는 메시지들에 답변을 했고, 한 팀 두 팀 예약이 들어오면서 시작된 나의 (에어비앤비 Airbnb) 공유 숙박 부업은 이후로 6년 넘게 계속되었다.
그 후 에어비앤비는 부업을 넘어 나의 삶을 예상치 못하게 변화시켰고, 내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기회들로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