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낯선 사람이 있어요
세계 여행으로 이어진 Airbnb부업
AIrbnb를 시작하고 첫 6개월은 늘 정신이 없었다. 우선은 쉽게 영어로 답을 할 수 없으니 답변 하나 쓰고, 안내 메일 하나 보내려면 한참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씩 매뉴얼들이 만들어졌고, 영어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무엇보다 6살 아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는 듯했다. 영어 울렁증이 있는 남편에게는 미안했지만,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다. 남편은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외국 손님이 말을 걸까 봐 도망치듯 마당을 피해 들어갔고, 아이와 내가 외출하고 없을 때 손님이 들어오면 집안 불을 모두 끄고 집에 아무도 없는 듯이 숨어 있었다. 행여나 그들이 말을 시킬까 봐 두렵다고 했다. 나와 아이는 손님이 돌아오면 오늘 하루 어디 갔었냐, 밥은 먹었냐 어설픈 영어로 수다가 이어졌던 데 반해 남편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영어 대화가 그렇게 무섭다는 게 잘 이해 안 갈 때도 있었지만 부업에 반대하지 않고 사랑방 욕실 청소를 도와주며 나의 부업을 뒤에서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남편과 달리 아이는 우리 집을 찾는 낯선 이들을 너무나 좋아했다. 어느새 보니, 아이는 영업과 홍보의 막중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손님이 오면 마루 위에 서서 한껏 팔을 벌려 포옹과 미소, 뽀뽀로 그들을 맞이했다. 자기가 먹던 간식을 스스럼없이 그들의 입에 나눠 주었다. 연신 엄마를 부르며 단어를 영어로 물어보면서도 사랑방 손님방에 들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귤 쟁반을 들고 들어가면 나올 생각을 않았다. 홈스쿨링을 하고 시간이 많아지자 아이는 내가 바쁠 때 손님 체크인을 도와주며 용돈까지 챙겼다.
손님 체크인 시간이 되면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끌고 와야 하는 정도의 번거로움, 손님이 떠난 후 머리카락과 쓰레기들이 있는 방 청소, 욕실 청소를 하고 이불 빨래를 해야 했지만 비교적 시간이 자유로운 일이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집안일 조금 더하는 셈 치고 충분히 병행할 수 있는 부업이었다.
나는 대학 때 비행기 타기 전날까지도 수학 과외를 하며 돈을 모아 인도와 유럽 배낭여행을 했을 정도로 여행이 좋았다. 늘 여행에 대한 목마름이 컸던 나는 우리 집을 찾는 그들로부터 대리만족을 느낄 때가 많았다. 때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번거로운 볼 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한국 음식 만드는 법도 가르쳐 주며 소소한 일상의 재미들을 더해나갔다. 영어공부 또한 덤이자 큰 혜택이었다.
소득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집을 찾는 이들의 다양한 배경과 그들의 인생을 조금씩 나누면서 하루하루가 설렜다. 아이를 키우며 어른과의 대화가 목말랐던지라 마당에 앉아 나누는 그들과의 대화가 너무나 좋았다. 한국을 찾은 이유, 살고 있는 곳 이야기, 교육 이야기, 한국 음식 이야기 등 낯선 이들과의 대화는 나를 생기있게 해주었다. 노르웨이에서 생후 6개월도 안된 아기를 데리고 부산 여행 내내 아기가 먹은 거라고는 우유밖에 없다는 말에 이유식을 끓여 주었더니 에어비앤비 본사에 연락해 온라인에 A4 한 장만큼의 후기를 남겨주었던 부부, 아이가 하나 있는데도 입양을 통해 가족을 키워나가고 싶은 게 꿈이라며 한국에 아기를 입양하러 온 부부, 북한을 여행하고 왔다며 칭다오 병에 담아 온 북한 잣 막걸리를 함께 마시자며 북한 사진을 보여주던 이탈리아인, 생후 3개월 때 한국에서 프랑스로 입양되었다며 3개월 된 아기 사진이 박힌 한국 여권을 꺼내 보여주며 밥을 먹자는 친구 등 예상치도 못했던 이들을 만나며 울고 웃었다.
나의 시간과 나의 건강한 밥상을 나누었고, 서로의 삶을 공유하며 나는 어느새 한국 음식을 예찬하며 약과 음식의 중간쯤 되는 한국의 밥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따뜻한 마음을 느끼고 되돌아 간다면 한국에 대한 인상도 오래도록 좋게 남을 거란 생각에 사명감마저 느꼈다. 나이 차이 별로 나지 않는 그들에게, 엄마처럼 매일 저녁밥 먹었냐 물으며 그들의 밥을 챙겼고, 친구이자 열혈 호스트로 그들과 함께했다.
Airbnb 손님을 받으며 페이팔 계좌에 차곡차곡 돈이 쌓였고, 가끔은 부족한 생활비를 메꾸느라 그 돈을 써야 할 때도 있었지만, 마음속에 숨겨뒀던 희망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났다. 공무원 외벌이에 해외여행은 꿈도 못 꾸는 형편이었지만, 숙소비로 번 수익을 그대로 모아 나도 그들처럼 여행하겠다는 생각이었다. Airbnb에 포스팅된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숙박하며 이 돈으로 결제를 할 수 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계획이었다. 그렇게 사랑방 공유 숙박을 한 지 1년 되던 해 여름부터 나의 부업은 여행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아이를 데리고 여행사 패키지도 아닌 자유 배낭여행을 가겠다는 아내를 두고 남편은 놀랐을 뿐 아니라 걱정을 했다. 호텔이 아닌 공유 숙박으로 모아뒀던 페이팔 머니를 써서 숙박 예약을 했다. 영국의 전통 주택의 방 한 칸을 예약해 아이는 주인집 할아버지와 뒷마당, 야드에 나가 목공 체험을 하기도 했다. 늘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하던 아들을 위해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우는 가정집을 예약해 그 집 아이들, 애완동물들과 놀기도 했다. 덴마크의 어느 아파트를 예약했을 때는 매일 아침 숙소 앞이자 단지 내 놀이터에서 동네 꼬마들과 흙장난을 하고 동네 놀이터를 누볐다. 아이가 7살이라 나와 단둘이 하는 여행이 버겁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나랑 단둘이 하는 배낭여행에서 의젓하게 파트너 노릇을 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매해 여름이면 우리 집 Airbnb 숙박 예약을 막아놓고, 한 달씩 여행길에 올랐다. 남편도 이듬해부터는 휴가 일주일 간 합류해 배낭여행의 일부를 함께했다. 2012년 여름을 시작으로 코로나가 퍼지기 직전이었던 2019년 12월, 호주 여행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7~8년 동안 참 많은 곳들을 다녔다. 덴마크, 독일, 노르웨이, 영국, 포르투갈, 미국, 우간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호주 등 그 나라들의 놀이터란 놀이터는 다 누볐고, 자전거를 타고 끝없이 달리며 사람 없는 곳들을 찾아 그 나라들을 즐겼다. 마치 제주 한달살이 하듯 해외에서 여유 있게 한 달씩 그곳을 살았다.
코로나로 집 밖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발이 묶인 지금, 내가 아이 키우며 가장 잘한 일 가운데 으뜸으로 꼽는 것이 그렇게 여행을 다녔던 일이 되어버렸다.
내 친구는 너희 남편 고위공무원 아니냐며 매해 해외여행을 한 달씩이나 일삼는 나를 보며 우스갯소리를 건넸다. 큰 돈을 들이지 않고, 비행기 값만 모으면 여행할 수 있었다. 현지에서의 하루하루는 한국에서의 생활비 만큼만 쓰며 절약하면 충분히 가능했다. 대학 때 100만 원을 가지고도 비행기 끊고 가난한 배낭여행을 한 달씩 해봤는지라, 유사시에 쓸 수 있는 신용카드와 SOS를 칠 남편이 있는 것만으로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렇게 나의 인생을 고민하며 찾아 나섰던 부업은 내가 좋아하는 여행을 할 수 있도록 숨통을 튀워 주었고 우리 가족을 더 행복하게 성장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