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위한 충전의 시간
아이가 유치원에 간 후 나를 위해 배우고 공부한 것들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뭐든 재고 고민하다가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아 일단 좋아하는 것부터 배워보자는 마음에 커피를 배우기 시작했다. 최대한 배우는 비용을 줄이고자, 파트타임으로 일도 하고, 아르바이트 펑크도 대신하며 5~6년이 넘도록 카페를 드나들며 로스팅까지 배웠다. 한때 창업을 고민했던 적도 있었지만, 아이를 키우며 그 일에 온전히 집중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섣불리 시작할 수는 없었다.
아이가 학교 생활을 만족해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학교를 관둘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한국 학교에서 잘 적응이 안되니 외국을? 하는 대안도 고려를 해보면서, 결정된 것은 아니어도 뭔가 대비를 해놓고 싶었다. 어쩌면 아이를 핑계삼아 내가 나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남편 월급으로는 외국에서 공부를 하는 것은 꿈도 못꿀 형편이었다. 방법을 고민하며, 정 안되면 외국에서 수학과외도 하고 Airbnb로 손님도 받으며 부업이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서류 준비를 했던 적도 있었다. 물론 가장 걸리는 문제는 아빠의 부재였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준비했던 비자는 거절되었고, 또 한번은 유학원 사기를 당해 한국에 눌러앉아야 했다.
여차하면 국내든 해외든 카페에서 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배우며 경력을 쌓아놓았지만, 지금은 단골 카페에 아르바이트 대타 정도를 하며 7년 경력의 핸드드립 커피를 주변 사람들과 나누며 고급 취미로 커피를 즐기고 있다.
또 하나, 죽을듯이 열심히 했던 공부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TESOL(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이다. 한국 외대에서 운영하는 6개월짜리 단기 교육과정이었다. Airbnb를 하며 영어의 한계를 느꼈고, 누군가에게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이면 영어 실력도 향상되지 않을까 하는 황당한 이유로 시작하게 되었다. 입학 인터뷰부터 시작해 수업 모두 외국인 교수진이 영어로 진행하고 있었고, 커리큘럼 모두 영어로 진행되고 있어서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기에는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학교 적응에 불안한 아이를 보며 대비책으로 배워두어야 겠다는 생각과 미국 초등학교 수업 참관이 포함된 인턴십 프로그램도 마음을 동하게 했다. 미국의 교육환경을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은 궁금증이 컸다.
대부분 영어 교사로 일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나는 영어 뿐만 아니라 교수법에 대해서도 무지한 학생이었지만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마지막 과정으로 미국 LA쪽의 한달짜리 연수프로그램을 신청해서 가게 되었다.
아이를 친정엄마에게 맡기기로 하고 준비를 하던 중, 친정 엄마의 고관절이 심해져 집안일을 하시는 게 불편한 상황이 되었다. 아이를 봐줄 사람을 고민하다 결국 아이는 노르웨이행 비행기를 타는 상황이 되었다. 가족 모두 노르웨이 여행을 한해 전에 하면서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었고, 아들은 그곳에 다시 가고싶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곤 했었다. 여동생은 당시 노르웨이에서 돈 없는 고학생으로 친구 집에 얹혀살며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유일하게 유럽에서 외국인에게 대학원이 공짜다) 마침 석사논문을 제출하고 두달 정도 시간이 있었고, 한 달간 아이 봐줄 사람이 걱정인 내게 가볍게 인사처럼 건넨 말을 내가 덥석 물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짜리를 어떻게 혼자 비행기에 태우냐며 친정 엄마는 난리가 났지만, 내가 미국으로 떠나던 같은 날 앞선 시간으로 비행기를 예약했다. 매해 여름 AIrbnb 수익으로 여행하며 비행기를 탈 때마다 아이는 항상 내게 물었었다. "엄마, 우리는 왜 일등석을 못 타는 거예요? 그렇게 비싸요? 얼만데요? 한번 앉아봐도 돼요?"라고... 이때다 싶어, UM(성인 미동반 미성년자 서비스)를 항공사에 신청하고 몇해동안 모아뒀던 항공사 마일리지를 털어 비즈니스석을 끊었다. 나는 그 돈이면 여행을 두번 가겠다는 주의였지만, 혼자 가는 아이를 안전하고 마음놓게 보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다행히 아이는 9살 인생의 평생 소원을 풀며 비즈니스석 1번에 앉아 승무원 누나 한명을 독차지 하며 온갖 호사를 누렸다고 한다. 노르웨이에서 만날 이모가 좋하한다며 승무원 누나에게 특별 부탁을 해서 고추장 튜브 30개까지 얻어 이모에게 전했다고 하니 걱정할 것 하나 없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승무원을 따라 탑승구 안으로 몇발짝 떼던 아이는 내게 다시 돌아와 깊은 포옹을 하더니 평생 기억에 남을 모험길에 올랐다. 한참을 탑승구 앞에 서서 비행기가 떠나가도록 자리를 지키며 아이와 처음 떨어질 한달이 어떻게 다가올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미국에서의 한달이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오후 세시까지 수업을 듣는 동안 돈 아깝지 않을만큼 열심히 수업을듣고 질문을 하며 공부했다. 결혼 전을 생각해보면 학교 공부나 직장 출퇴근하고 집에서 쉬고, 그것이 전부였다. 그저 내 몸 하나 챙기고, 내 밥 한끼 챙기고, 내 일 하나 하면 그만인 인생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는 모든 것들이 멀티였다. 더구나 나는 육아만 하며 지내기에는 뭔가 불안한 마음에 늘 무언가 배우거나 부업을 하고 있었다. 아이는 두 세달에 한번쯤은 응급실에 데려가 링거를 맞춰야 할만큼 자주 아픈 아이였고, 몸이 약한 아이이니 바깥 음식보다는 거의 집밥을 건강식으로 해 먹이고 있었다. 3인분의 집안 일, 양가 집안의 대소사들 챙기기, 동시에 AIrbnb로 사랑방 손님을 받고 있었고, 틈틈이 카페에서 로스팅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이가 학교간 틈을 타 대학원 수업까지 듣고 엄청나게 쏟아지는 과제들까지 하고 있었으니, 설거지하며 머릿속으로 숙제를 먼저 하고, 밤이 되면 숙제하고 공부하느라 허리가 나가는 줄도 몰랐다. 내 하루는 그렇게 늘 멀티플레이였고 엉덩이 붙이고 쉴 시간이 없는 하루였다.
미국에서 한달을 지내며 아침부터 오후 세시까지 수업듣고, 오후에 도서관이나 숙소에서 공부하고 책읽고 밥먹는게 하루 일과였다. 그게 다였다. 정말이지 너무나 한가하고 여유로웠다. 다른 일 하나도 없이 공부만 하는게 이렇게 쉽고 축복스런 일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대학때 뭘 그렇게 힘들어했나 싶었다. 모든 시간이 느리고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심지어 멈춰있는 것도 같았다.
그곳에서 미국 초등학교에 Observation을 하러 가면서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초등학교 수업 풍경들을 접했다. 엄하지만 의견을 말하는 데 있어서 너무 자유로운 모습에 놀랐다. 부러웠고 아이가 생각났다. 수업 마치고 학교 나무 그늘아래에서 같이 간 학생들과 커피한잔을 마시면서도 여전히 내 머릿속에서는 아이의 교육 문제는 떨쳐지지 않았다. 아이와 떨어져 나를 온전히 생각하자 여겼고, 아이에게 과하게 몰입한 것은 아닌지 늘 경계해야 했기에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겼지만 그곳에서 단 하루도 아이에 대한 학교 고민을 떨칠 수는 없었다.
한달간의 휴가와도 같은 시간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오자 아이는 노르웨이에서 있었던 꿈같은 시간을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반면 개학이 하루하루 코앞으로 다가올수록 아이는 짜증과 히스테리를 부리며 학교 가는 것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보였다. 그리고 아이와 진심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매일 학교가는 길이 지옥같다고 토로하는 아이를 보며 더이상 학교로 밀어넣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대화 끝에 며칠 간 고민을 했고, 학교를 나와 홈스쿨링을 해보자며 아이에게 용기 내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아이와 한달간 떨어져 지내며 10년만의 휴식을 했던 것이 나로 하여금 그 용기를 낼 수 있게 한 힘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랑 계속 붙어 지내며 거리를 두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런 결정은 내리기 더 어려웠을 것 같다.
모든 것은 너무 가까울 때 그 귀함을 종종 잊어버리게 된다. 충전의 시간을 통해 내가 아이 문제를 '학교를 가고 안가고' 정도의 좁은 시야로만 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사회적 기준과 틀에 박힌 사고로 아이를 바라보니, 학교 부적응은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실패처럼 여겼졌던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밝던 아이를 더 이상 병들게 할 수 없었다. 뭘 그리 대단한 것을 배우게 하겠다고...
아이 문제를 지나치게 부여잡고 집착하고 있는 것을 떨치려 시작한 한달간의 휴가는 나로 하여금 문제의 본질을 볼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게 해주었다. 종종 강연을 하다보면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거나 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아이 때문에 무너져, 눈물을 흘리는 어머님들을 보게 된다. 그분들께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조금 가져보시라고 권하고는 한다. 거리를 두고 귀한 것들을 바라볼 때 더 중요한 것들이 보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