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하고 4월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아침 등교 준비를 하며 마루에 앉아 신발을 신던 아이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물었다.
엄마~ 학교는 왜 다니는 거예요?
가슴이 철렁했다.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어리바리하게 의무교육이다, 그 이유를 찾아봐라, 선생님께 물어봐라 등 말도 안 되는 답들을 하며 아이를 학교에 보냈다.
이후 아이는 단 한 번도 학교를 안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거나 떼를 쓴 적은 없었다. 그러나 매일 아침 아이의 어깨는 축 쳐져 있었고, 표정은 어두웠으며,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못내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이후에도 아이에게 학교를 왜 다니기 힘든지에 대해 일언반구 한 적이 없었고, 그저 두려웠다.
중고등학교 때쯤 왜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이 스스로 자문하며 공부하길 바랐고, 그 정도 고민과 사춘기는 내 과감히 기다려주리라 단언했던 엄마였건만, 예상했던 시기보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그렇게 내색하지 못한 채 교육, 학교, 대안교육, 해외 교육 등에 관한 자료들을 아이 모르게 찾아보며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이가 알면 오히려 혼란스러울 것이라고만 생각하며 감추기에 급급했다. 그동안 나는 아이를 학교에 잘 적응시키기 위해 한약부터 시작해 심리 상담까지 하며 해결책들을 찾아보았지만, 날이 갈수록 아이의 학교 생활은 위태로워 보였다.
숙제도 알아서 챙겨가고, 하교하면 선생님들 퇴근하실 때까지 운동장에서 실컷 놀며 얼핏 보기에 그럭저럭 잘 지내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하교 후 돌아온 책가방 안에는 종이접기 한 곤충이며 로켓, 로봇들이 한가득 들어있었고, 가끔씩 친구들 다수로부터 당한 억울한 심정들을 토로하기도 했고, 담임 선생님에 대한 불만족들을 얼핏 비치기도 했었다. 초등학교 때 저 정도야 누구든 겪는 일 아니냐며 스스로를 설득시켰고, 학교라는 커다란 배에 어떻게든 타 있게 하려고 애썼다. 걱정의 마음을 거두지 못하고 공교육에 대한 실망감과 불안감을 안은 채 초등 6년을 보내게 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초등 3학년 2학기 개학을 앞둔 어느 저녁, 아이는 히스테리가 심해질 대로 심해져 온몸 가득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마치 시한폭탄 같았다. 보다 못해 아이를 앉혀놓고 대화를 시도했지만, 아이는 진심을 말해도 바뀌는 것은 없지 않냐며 입을 닫았고, 마음을 닫았다. '다른 애들은 다 잘 다니는 학교를 너는 왜' 하는 옹졸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아이의 마음을 들어보자며 대화를 있어 나갔고 더 이상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야 했다.
아이는 선생님에 대한 불신, 친구들로부터의 스트레스, 수업시간의 불만족 등으로 가득해 그 무엇 하나 학교에 다닐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2년 내내 매일 아침 학교 가는 길이 지옥 같았다는 말을 하며 울고 있었다. 더 이상 아이에게 학교를 다닐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아이의 밝은 모습을 영영 잃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꼈고,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아이가 많이 멍들고 병들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2년 내내, 학교를 관두는 것이 아이 인생의 실패일지도 모른다는 잘못된 생각에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좌절감이라 느꼈던 마음들을 추스르고, 용기 내어 새로운 시작을 해야 했다. 초등 3학년 2학기 첫 주, 아이는 학교에 자퇴서를 내고 사물함 한가득 들어있던 물건들을 챙겨 나왔다. 이후 4~5년간의 홈스쿨링이 시작되었다.
나는 아이의 질문 이후 학교에 다니도록 하면서, 2년 내내 교육에 관한 책들과 정보들을 찾으며 대안을 찾기에 바빴다. 뾰족한 대안이, 학교보다 나은 대안이, 그럴싸한 옵션이 있어야 관둘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과감히 내 안에 있는 관성의 사회적 틀을 깨고, 아이를 중심에 세우고 아이를 인정해야 하는 용기였다. 내 아이는 학교가 힘든 아이라는 것, 나아가 수동적으로 답습할 수 있는 관습에 대해 과감히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나보다 큰 그릇의 아이라는 것도 뒤늦게 시야에 들어왔다.
고민을 하며 스트레스가 심해 공황장애마저 느낄 정도였으니 나는 범생이로 살아오며 이미 내가 만들어 놓은 협소하고 편협했던 틀에 갇혀있는 답답한 사람이었다. 늘 적당히 모범생으로 살아오며 만족하지 못했으면서도 그 틀을 감히 깨려고 조차 못했던 내가 보였다.
그동안 나는 인생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중간에 포기하거나 도망치곤 했었다. 직장이 마뜩지 않으면 그 안에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최선을 다했던 적이 거의 없었다. 가난한 부모 때문에 공부를 더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내가 그만큼 간절하게 부여잡고 늘어졌던 적이 있었는지? 사회생활하며 돈에 쪼들리고, 상사에게 스트레스 받으며 결혼을 도피처로 삼지는 않았는지? 친구의 어느 한구석이 맘에 안 든다며 내가 잘못이라는 생각보다는 그저 남 탓하며 관계를 회피해 버릴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았다.
모든 상황에서 나는 늘 도망치기 바빴고, 남 핑계를 대며 중간에 그만두기 일쑤였다. 그러나 자식을 키우는 일은 도망갈 곳이 없을 뿐 아니라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키우기 어렵고, 예민하고, 남들 같지 않다며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보다 그릇이 크고, 나보다 담대하고, 직관적이며, 나보다 사회에 비판적이고, 근본적인 모든 것들에 질문을 던지는 이 아이를 통해 남들 눈을 서서히 덜 의식해야 했고, 용기를 내야 했다. 끝까지 부여잡고 안 되는 것들을 하나둘씩 해결해 나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검은 심연 속에서 빠져나와 한 다리씩 힘을 주고 일어서서 걸을 수 있었다.
학교 밖을 나와 남들이 가지 않은 잡초 무성한 길에 들어서며 늦은 밤 그 두려움에 울었던 날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주저 않으면 이 아이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었다. 아이 탓이라며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담대하게 서서 손을 잡아줘야 했고, 때론 내가 잡초 덤불들을 치워주기도 해야 했으며 때론 뒤를 묵묵히 따르며 멈추고 싶은 외딴 길을 계속 걸어가야만 했다.
처음에는 이 특별한 상황들을 탐탁지 않아했던 남편도 길의 저 뒤편에서 희미하게 함께 오고 있었다. 앞장서지 않았어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걷는 이가 한 명 더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다. 홈스쿨링의 첫 일 년, 무기력해질 대로 무기력해진 아이를 부여잡고 울었던 날도 많았고, 한 달 내내 종이만 접는 아이를 바라보며 애써 불안함을 감춰야만 했다.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아이는 회복되었고, 생기를 되찾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씩 의욕을 보였고, 하루하루 실컷 책 보고, 마음껏 산책하고 뛰어놀고, 자기가 좋아하는 종이 접기며 로봇 만들기로 온종일 행복하고 의미 있는 시간들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학교 공부가 걱정되는 날도 많았고, 여러 시도들도 해보며 온갖 실패와 시행착오의 시간들을 거쳤다. 홈스쿨링 한지 몇 년이 지나자, 아이는 놀이 삼아하던 종이접기는 수준급이 되어 있었고, 갖고 싶은 로봇이 있다며 반년 넘도록 로봇 대회에 나가더니 로봇을 꽤나 잘 만드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어느새 아이는 성장해 SBS 영재 발굴단 프로그램의 요청을 받아 로봇영재로 방송에 소개되는 행운까지 선물 받았다. 이후 자신감이 충만해진 아이는, 초등학생을 위한 종이접기 강좌를 열어 아이들에게 종이접기도 가르쳐 주고, 일일 장터에 나가 종이접기를 팔기도 하고, 종이 접기와 로봇으로 <미르의 종이접기>라는 유튜브를 운영하기도 했다. 방송이 인연이 되어 한 로봇 회사로부터 후원을 받아 원 없이 부품 걱정 안 하고 로봇을 만들어보는 기회도 얻었다. 이후 로봇 대회에도 꾸준히 나가 장관상을 거머쥐기까지 했다. 작년에는 <게임 종이접기>라는 판타지 소설을 가미한 초급 수준의 종이접기 책을 출간해 꼬마 작가 소리를 듣기도 한다.
지난 4~5년간 아이와 함께 했던 시간들은 학교에 다녔더라면 절대 경험해보지 못할 시간이었다. 아이가 고립될까 걱정되어 끊임없이 친구들 만날 기회들을 찾아야 했고, Airbnb 손님들이 아이와 마당에서 놀고 있으면 온갖 한국 간식들로 그 시간들을 응원했다. 초등학교 교과과정만큼 치밀하고 계획적이지는 못했었지만, 적어도 아이가 즐거운 하루하루, 행복한 유년기를 보낼 수 있길 바라며 열심히 함께했고, 응원했다.
어느날 아이는 나의 응원을 이렇게 표현해 주었다.
"엄마, 저는 원석으로 태어났는데 엄마라는 세공사를 만나 다이아몬드가 되어 가는 것 같아요" 라고
엄마로서 이런 찬사는 더 이상 없었다.
초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졸업하고, 이제 중2가 된 아들은, 남들이 당연하게 여기며 가는 중학교를 본인 스스로 고민의 시간을 거쳐 선택해서 다니고 있다. 사춘기에 접어들며 친구가 좋을 때라 그런지 생각보다 재미있다고 한다. 아이는 혼자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일찍 배워서 학원 보내달라는 소리를 수 없이 하고, 가고 싶은 학교가 생겼다며 학교 공부에도 열심이다.
부모들은 자신 스스로도 모르게 자식을 키우며 본인의 기준을 아이에게 주입하고, 강요하곤 한다. 나도 그런 부모였고, 내가 내 기준과 사회의 기준들을 아이에게 끊임없이 강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매사 까칠했고, 내가 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무엇이든 토를 달았고, 이유를 물었다. 처음에는 그런 순간마다 번거로웠고, 골치 아팠고, 너는 왜 이렇게 까다롭고 순조로운 게 없냐며 탓했던 적도 많지만 지금에 와서야 알았다. 아이가 세상을 향해 수없이 던지는 질문들을 말 안 듣는 행동으로 간주하고 묵살해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 나였다는 것을...
그럼에 나는 오늘도 아이의 성가심이 감사하고, 아이의 까다로움이 불편하고, 순조롭지는 않지만 우리 가족의 성장을 위한 선물이라 여긴다. 그만큼 나는 조금 더 나은 어른으로 도망치지 못하고 성장하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