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외로운 선택과 그 책임의 무게
아이가 학교를 나와 홈스쿨링을 하며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평화롭고 행복해서 가끔은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학습에 대해 너무 목메지 않으면 아이 하고 싶은 것 하며 충분히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여전히 이 아이가 대한민국에서 교육 기관을 통해 즐겁게 공부할 수는 없을까 늘 고민하고 대안을 찾아야 했다.
학교 다닐 때 주말마다 다니던 교육청 영재교육원도 홈스쿨링을 하면서는 자격이 되지 않는다며 교육청으로부터 자격 박탈을 통보받기도 했다. 공교육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으면 그 어떤 교육적 혜택은 없다고 선을 긋고 있었다. 별안간 학생 한 명 있는 학교의 초짜 교장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내 아이의 미래를 위해 내가 도와줘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앞으로 초등 이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 장기적인 계획들이 필요했다. 더구나 우리 가족은 종교도 없어서 홈스쿨링 커뮤니티 조차 없었기에 더 외롭고 당황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잘하고 있는지 불안했고, 누군가에게 내가 잘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다고, 외딴 길을 아이와 걷다 보니 그 외로운 길에서 자기만의 큰 우주를 키우며 다름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분들을 만날 수 있는 행운도 있었다. 어느 대형 입시학원의 대표님은 사교육에 그렇게 오래 몸담고 계셨으면서도, 내가 준규를 키운 방식들을 응원하셨고 꼭 책을 써보라고 말씀하셨다.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될 수 있다고...
한때 치열한 입시 현장에 계셨고, 교육 전문가로 활동하시는 다른 분은 우리나라 교육의 안타까운 면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내 아이가 공부하는 방식, 삶의 방식을 응원하시며 책을 꼭 써보라고 응원하시며 출판사까지 소개해 주셨다. 초등학교에 오래 몸담았고, 장학사로 계시던 은사님은 울며 아이 걱정을 하는 내게 '지현아~ 초등학교 때 배우는 거 별로 없어, 괜찮아~' 하며 내 불안감을 덜어주셨다. 대학 은사님은 사회의 정해진 시스템을 그대로 답습해야 하는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8살이 얼마나 되겠냐며 자식 잘 키웠다며 응원하고 지지해주셨다.
그렇게 내가 이 아이를 키우는 방법이 남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 때론 내가 틀린 것은 아닐까 흔들릴 때, 그분들의 격려와 응원은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는 큰 힘이 되었다. 무엇보다 항상 내 옆에서 '너는 잘하고 있어'라며 든든한 격려를 해주던 남편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응원을 아낌없이 주시는 분들로부터 용기가 생겼고 고심 끝에 초고를 몇 군데 보냈다. 그리고 소개 덕분인지 며칠 지나지 않아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주류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진심이 담긴 울림이 있는 이야기가 좋았다고 하셨다. 출판사 대표이기 앞서 아이 엄마로서 공감 가고 응원하고 싶다며 책을 내보자 하셨다. 미팅 날짜를 잡고 전화를 끊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해 소식을 전하고, 친정 엄마에게 소식을 전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엄마의 흥분된 모습에 덩달아 신이 나 있던 아이가 배고프다고 해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반이 넘어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급하게 라면을 끓여놓고 아이와 식탁에 앉아 첫술을 뜨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조금 다른 감정도 섞여 있었다. 그동안 내색은 못했지만, 아이와 외롭게 지내온 우리 집 학교, 부모로서 했던 무모했을지 모를 선택,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너 애썼다, 누구보다 아이를 위하는 방법으로 잘한 거야~' 라며 누군가 등을 토닥여주는 것 같았다. 내가 아이를 키운 방법이, 그 방향이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받은 것 같아 너무 뭉클했고 행복했다. 그 날은 전업주부의 나에게 작가라는 어색한 이름을 붙여주던 역사적인 날이었고, 경단녀의 삶에 희망이 비치는 날이기도 했다.
라면을 입에 넣으며 소리 내어 꺼이꺼이 울자 당황한 아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웃음과 울음이 한데 섞여 마치 미친 사람 같았다. '엄마가 너무 행복해서, 너무 좋아서 그래~'라고 하자 아이도 안심이 되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배시시 웃었다. 그날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했지만 전투적이었던 내 마음속 긴장들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이후 책을 출간하는 과정에서 동네 유명한 물나무 사진관에서는 책 표지 사진을 찍어주시며 응원을 해주셨고, 교육 전문가 분은 출간 기념 강연 자리까지 마련해주시며 <준규네 홈스쿨>을 응원해주셨다. 독서모임에서 만난 GQ 편집장이었던 이충걸 편집장님, 아이와 연이 되었던 문경수 탐험가님, 초등 장학사님 등 많은 분들이 책을 응원하며 기꺼이 추천사를 써주셨다.
책 출간 후 섭외 요청이 들어올 때 강연을 띄엄띄엄했지만, 내가 자리를 만들어서 간 강연들도 꽤 있었다. 소규모지만 부모 독서모임은 거의 자청해서 갔다. 홈스쿨링을 하는 부모들을 위해 강연도 기획했다. 나처럼 그들이 외롭고 불안할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곳이 있길 바랐다. 코로나로 인해 강연 자리들이 줄어들면서는 코칭 프로그램도 기획했다. '상담 전문가도 아닌데' 라는 마음에 오래도록 고민했지만, 가끔 블로그를 통해 불안함과 답답함을 토로하는 부모들을 보며 용기를 내어 시작하게 되었다.
강연을 하다 보면 강연 내내 우는 부모님들이 계셨다. 시작부터 울기 시작하셔서 끝날 때까지 우셨다. 대부분은 아이가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부모님은 어떻게든 잘 적응했으면 하는데, 아이는 도저히 안 가겠다는 경우들이었다. 그런 부모님들을 보면 마치 내 모습 같았다. 그리고 그 외로운 길에서 누구 하나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나는 내 아이가 홈스쿨링을 했다고 해서, 반 공교육적이거나 학교가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학교가 가진 사회적 역할이 있고, 어떤 친구들은 그 안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내 아이처럼 그 안에서 견디기 힘든 시기들이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모두 다르니까...
학교가 좋다 나쁘다, 다닌다 안 다닌다, 학교를 잘 다니는 게 성공, 못 다니면 실패로 보는 그런 이분법적인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부모 시선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학교에서 힘든 아이와 부모들을 진심으로 위로할 수 있었고, 응원할 수 있었다. 위기처럼 보이는 그 시간들이 어쩌면 기회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아이가 중학교에 간다고 결정했을 때, 다니다 또 적응 못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절대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설령 다니다가 관두게 되더라도 그 또한 아이 인생에서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이로부터 배웠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아이가 자라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부모가 아닌 학부모가 되길 자청한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관성처럼 그렇게 돼버리곤 한다. 안전하게 관리받을 수 있는 시스템 속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자만이 행복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동시에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책 <꽃들에게 희망을>에서처럼 우리가 남을 밟고 올라간 꼭대기가 전부가 아니란 것을...
모든 일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했던 나는 아이를 낳고 기르며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나만 왜 이러냐며 투덜거리는 내가 더 이상 아니었다. 이 힘든 일을 겪고 나면 난 또 성장해 있겠구나 기대하며 그 시간들에서 도망치지 않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든든한 남편이 항상 나를 격려하고 있었고, 꼬장꼬장한 아들이 나를 끊임없이 단련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