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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사람의 쓸모

나의 쓸모+엘가 사랑의 인사

by 헤이리리

우리는 다양한 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바지, 치마, 원피스, 나시 등 다양한 옷을 선택할 수 있어요.


흔히 '역할'을 '옷'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태어나서 한 가지 역할만 하는 사람은 거의 없죠.

태어난 이상 누구든 자식의 역할을 맡고 있고요,

자라나면서는 학생의 자리는 모두 거쳐가는 거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딸, 아내, 며느리, 엄마, 학생, 선생님 이 정도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시간에 따라 어느 옷을 많이 입고 있느냐가 '나'라는 사람을 규정하는 거 같아요.

10대는 학생의 옷을 20대는 학생 또는 직장인으로 많이 살게 되고 30~40대에는 선택에 따라서

입을 수 있는 옷이 정해지는 거 같아요.


저는 30대 초반에 아이를 낳아서 돌봄을 시작했습니다.

근 10년을 아이 셋을 낳고 기르다 보니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이 희미해져 가더라고요.

물론 아이를 낳고 돌보는 일은 어렵고 귀한 일이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더라고요.

'엄마'로 살고 있지만 '나'로도 살고 싶은 그 마음 아시는 분은 아시죠? ㅎㅎ

'나'라는 사람의 쓸모는 무엇인지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살면 되는 건지 고민이 많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KakaoTalk_20250204_202109681.jpg 나의 쓸모-최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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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의 얼굴이었던 화병. 크리스마스 때면 화려한 장식으로 우아한 자태를 뽐내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식으로 인해 입구가 깨지게 되었고 가로등 아래 어두컴컴한 곳에 버려졌습니다.

그런 화병을 주운 건 한 할머니. 먼지를 털어내고 바닥에 구멍을 뚫어 화분으로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화병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름 대신 '10번'이라는 이름표와 함께 낡은 병과 깨진 잔, 오래된 주전자와 함께 있는 게 못마땅하기만 하지요. 화려하고 조명을 받으며 자태를 뽐내는 자리에서 시큼하고 지렁이가 기어 다니는 베란다에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화분도 그렇지만 베란다에 모여 있는 다른 화분들에게도 화려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파리의 레스토랑에 있던 포도주병, 노을 지는 바닷가에 있는 카페에서 온 칵테일 잔, 장맛을 책임지던 장독대까지.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지금은 화병과 함께 할머니의 베란다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삶에서 즐겁고 행복한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화분 10번.

하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알게 됩니다.

다른 화분들 속에서 피어나는 각각의 새로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새로운 쓸모를 찾아간다는 걸요.


그리고 자신의 화분에서도 새로운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히고 있다는 사실을요.




저는 어렸을 적부터 바이올린을 배웠어요. 제가 학생 때는 바이올린을 배우는 사람이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악기 케이스를 들고 다니기만 해도 친구들이 신기해했지요.

중학생이 되어서 학교 축제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 선생님께서 절 부르시더군요. 학교 축제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두둥-

300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 앞에서 연주라니요. 그것도 전 햇병아리 1학년이었거든요.

너무 하기 싫었지만 등 떠밀려 연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날이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네요.

그날 연주했던 곡은 엘가'사랑의 인사'였습니다.


화면 캡처 2025-02-04 211535.jpg 에드워드 엘가 1931년


이 곡은 1888년에 캐롤라인 앨리스 로버츠와의 약혼 기념으로 작곡된 곡입니다.

엘가는 9살 연상의 캐롤라인 앨리스 로버츠를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평민 출신으로 많은 교육을 받지 못한 엘가에게 엘리트였던 캐롤라인은 강력한 후원자이자 동반자였습니다. 1888년, 캐롤라인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둘은 약혼을 했고 엘가는 캐롤라인에게 사랑과 고마움을 담아 'Liebesgruss'(사랑의 인사)를 작곡하여 선물했습니다. 지금은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 다양한 버전으로 연주되고 있어요.





너른 운동장에서 반주도 없이 무반주로 마이크 앞에 서서 바들바들 떨며 제대로 연주를 한 건지 만 건지 정신없이 끝났던 그 시간. 부끄럽고 창피해서 숨고 싶었던 시간이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름 뿌듯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계속 배워온 악기 덕분에 연주라는 걸 할 수 있었으니 말이에요.

그때 저는 처음으로 연주자로서의 저의 '쓸모'를 느꼈던 시간이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연주자를 꿈꾸며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지금은 '연주자'대신 '엄마'의 옷을 많이 입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10번 화분처럼 제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화려한 꿈을 꾸던 '나'는 어디에 간 건지, 거울 속에 서 있는 제 자신을 쳐다보며 한숨을 쉰 적도 많았답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달라요.

예상하지 못했던 옷을 입고 있지만 이 옷도 나름 저에게 잘 맞는다는 것을요.

그리고 저를 바라보며 서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저의 다른 '쓸모'가 보인다는 사실이 감사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삶은 예측할 수 없고, 때로는 기대와 다르게 흘러갑니다. 하지만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또 다른 시작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내가 쓰이는 그 자리는 어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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