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엄마는 작은 새가 되어 날아갔다(6)

6장. <우리의 울음은 하나의 멜로디였다〉

by 슬기로운 겨미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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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서로의 거울이 되어


1. 가장 오래된 증인


슬픔 속에서 형제자매는 서로의 가장 오래된 거울이 된다. 나의 배우자도, 나의 자식도 알지 못하는 유년의 풍경과 부모의 가장 깊은 골짜기를 함께 통과한 유일한 증인. 우리는 그 거울 앞에서 비로소 가면을 벗고, 가장 무방비한 모습으로 서로의 슬픔을 비친다. 나의 울음은 여동생의 울음으로 완성되었고, 여동생의 슬픔은 나의 슬픔에 기대어 비로소 제 무게를 찾았다. 우리의 울음은 결코 독창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하나의 멜로디였다.

oldmirror.png 오래된 거울

장례 둘째 날, 이른 새벽이었다. 밤새 묵직하게 가라앉은 빈소의 공기 속에서 나는 잠시 졸고 있었다. 그때, 육중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겨울 새벽의 칼날 같은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제주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온 동생이었다. 비행과 추위에 지친 패딩 끝자락이 먼저 보였고, 그 뒤로 밤바람을 오래 맞아 붉어진 동생의 눈이 보였다. 캐리어 손잡이를 쥔 손은 하얗게 얼어 있었다.


“오빠…”.


그 한마디가 밤새 내가 쌓아 올린 모든 둑을 무너뜨렸다. 동생은 캐리어를 그 자리에 쓰러뜨린 채 내게로 와 얼굴을 묻었다. 나는 동생의 차가운 등을 감싸 안았다. 비행기 좌석의 냄새와 차가운 새벽 공기의 냄새가 섞여 코끝을 찔렀다. 동생의 어깨가 가늘게 떨려왔고, 그 떨림은 이내 걷잡을 수 없는 흐느낌이 되어 내 가슴팍을 축축하게 적셨다. 나 역시 소리 내어 울었다. 우리는 같은 기억의 뿌리에서 자라나, 같은 날 가장 큰 가지를 잃어버린 한 그루의 나무였다. 서로의 어깨에 기댐으로써, 우리는 가까스로 쓰러지지 않고 서 있었다.

그 포옹은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을 불러왔다. 초등학교 시절(당시는 국민학교였었다.), 내가 크게 앓아누웠던 밤이었다. 열에 들떠 끙끙 앓는 내 곁에서, 어린 동생은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서툰 손길로 물수건을 갈아주었다. 그때 동생의 작고 차가운 손이 내 이마에 닿았을 때 느꼈던 안도감. 지금 내 어깨를 붙잡은 동생의 손은 그때보다 훌쩍 커버렸지만, 그 안에 담긴 절박함과 위로의 온도는 그때와 같았다.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서로의 보호자이자 피난처였다.


2. 과거형이라는 낯선 문법


우리의 슬픔은 같은 기억을 공유하기에 더욱 아팠고, 동시에 서로에게만 온전히 이해받을 수 있었다. 한밤중에 허기를 달래려 함께 갔던 장례식장 옆 편의점. 과하게 밝은 조명 아래, 가지런히 정돈된 상품들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동생은 컵라면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문득 나를 보며 말했다.

“오빠, 엄마가 매운 거 못 드셨잖아. 라면은 순한 걸로 사자.”

cupnoodles.png 그리움 컵라면

‘~셨잖아’. 무심코 튀어나온 그 과거형 시제가 일상에 박히는 순간, 우리는 함께 숨을 멈췄다. 어머니의 부재가, 관념의 세계를 넘어 이제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세계까지 지배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서늘한 신호였다. 슬픔은 이토록 집요하게 우리의 삶 모든 곳에 자신의 문법을 새겨 넣고 있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고, 동생은 조용히 순한 맛 컵라면 두 개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우리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침묵의 대화이자, 슬픔의 문법이었다.


병원 복도 벤치에 앉아 차갑게 식은 도시락을 나눠 먹던 수많은 오후들. 중환자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생체 신호 모니터의 숫자를 함께 세며 가슴 졸이던 그 밤들. 누구에게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그 공통의 기억은, 슬픔의 무게를 더하는 동시에 세상에 우리 둘 뿐이라는 유대감을 새기는 밧줄이 되기도 했다.

그날 밤, 빈소에서 잠든 조카들을 바라보던 동생이 나지막이 말했다.

“오빠는 늘 버텼지.”

“너는 늘 가까이 있었지.”


우리는 서로의 역할을 너무나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는 장남이라는 이름으로, 아들이라는 책임감으로, 슬픔을 이성으로 누르며 버텨내는 역할을 맡았다. 동생은 딸이라는 이름으로, 어머니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체온을 나누는 역할을 맡았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역할을 정한 적이 없었지만, 언제나 그렇게 서로의 자리를 지켰다. 우리는 어머니의 아들과 딸이기 이전에, 서로의 오빠이자 동생이었다. 그리고 이제, 어머니가 떠난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의 유일한 목격자로 남았다.


2부. 슬픔의 이중주


3. 역할이라는 리듬


슬픔은 우리에게 새로운 리듬을 부여했다. 우리는 장례식의 분주함과 혼돈 속에서, 한마디 상의 없이도 물 흐르듯 역할을 나누었다. 나는 부고와 행정 절차, 조문객 안내와 같은 바깥일을 맡았다. 나의 아내는 서류와 금전 정리를 맡아 나의 빈틈을 메웠다. 동생은 빈소의 안쪽을 살폈다. 시들어가는 국화꽃을 갈아주고, 물컵을 채우고, 잠든 아이들을 돌보는 일. 매제는 묵묵히 움직이며 주차 안내부터 식사 조율까지, 궂은일들을 도맡았다.

theater.png 한 편의 연극

우리는 마치 오래전부터 연습해 온 한 편의 연극처럼, 각자의 동선 위에서 움직였다. 말은 거의 필요 없었다. 눈빛만으로 서로의 피로를 가늠했고, 짧은 고갯짓으로 ‘괜찮아?’, ‘조금만 더 힘내’라는 말을 주고받았다. 말을 아껴야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감정의 소모를 최소화하고, 주어진 역할을 기계처럼 수행해야만 이 사흘이라는 시간을 건널 수 있었다. 우리의 슬픔은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수행해야 할 하나의 과업이 되어 있었다.


장례가 끝난 뒤에도 우리의 리듬은 계속되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상의했다. 거창한 계획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집을 돌보는 일, 수목장을 찾는 일. 우리는 마치 회사의 프로젝트처럼, 각자의 역할을 나누어 달력에 표시했다.

[정기적: 아버지 방문 (오빠/동생 번갈아)], [명절과 두 달에 한번: 어머니께 방문]. 일정표는 가족 단체 대화방 상단 공지로 고정되었다.


누군가는 우리의 방식이 너무 건조하고 사무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슬픔이라는 막연하고 거대한 감정을, ‘해야 할 일’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그 무게에 짓눌려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을 터였다. 동생이 달력에 ‘어머니 방문 완료’라는 체크 표시를 하나씩 올릴 때마다, 나는 마음의 여백이 조금씩 메워지는 걸 느꼈다.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자식’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함께 이 슬픔을 건너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최소한의 의식이었다.


4. 눈물의 화음


우리의 눈물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간에 터져 나왔지만 결국 하나의 화음으로 만났다. 나는 주로 혼자 있을 때, 무방비한 상태에서 울었다. 장례식장 지하 복도 끝, 차가운 정수기 앞에서, 혹은 모든 일을 마치고 차 문을 닫고 핸들을 잡은 바로 그 순간. 나의 울음은 소리 없는 무너짐에 가까웠다.

반면 동생의 울음은 조금 더 따뜻한 온도를 가졌다. 아이들이 잠든 뒤,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부엌 식탁에 홀로 앉아 있을 때. 그녀의 울음은 고단함과 그리움이 뒤섞인, 조용한 흐느낌이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홀로 흘리는 눈물이었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세상 어딘가에서 나와 같은 온도로 울고 있을 단 한 사람의 존재를.

alone.png 식탁에 홀로 앉아...

어느 늦은 밤, 동생에게서 짧은 문자가 왔다.

‘오빠, 오늘은 너무 힘들다.’

나는 그 문자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나 역시 온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마음은 텅 비어버린 날이었다. 하지만 나는 답장을 보냈다.

‘오늘은 내가 힘낼게. 너는 울어도 괜찮아.’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동생의 무너짐은, 역설적으로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었다. 오늘은 내가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나의 슬픔을 잠시 잊게 했다. 며칠 뒤, 내가 먼저 무너지는 날이면, 동생이 똑같은 문장을 내게 돌려주었다. ‘오빠, 괜찮아. 오늘은 내가 버틸게.’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감정적 파수꾼이 되어, 슬픔이라는 긴 밤을 함께 건너고 있었다. 마치 숨을 참는 잠수부가 수면 위로 번갈아 떠오르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숨 쉴 틈을 만들어주었다.

3부. 살아있는 유산


5. 거울 속 메아리

그날은 장례가 끝나고 처음으로, 여동생과 나 둘이서만 아버지의 집에 들른 저녁이었다. 아버지는 잠시 외출 중이셨고, 집 안에는 어색할 만큼 깊은 고요가 흘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동생이 나지막이 말했다. “오빠, 엄마 방… 한번 들어가 볼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마치 허락받지 않은 성역에 들어가는 아이들처럼, 조심스럽게 안방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익숙한 냄새가 우리를 감쌌다. 어머니가 쓰시던 화장품의 희미한 분 냄새와 오래된 나무 옷장에서 나는 냄새,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감싸고 있던 어머니만의 살냄새. 후각은 가장 정직하고 강력한 기억의 통로였다. 그 냄새에 시간은 순식간에 거꾸로 흘러, 마치 어머니가 잠시 외출하신 것처럼 느껴졌다.

동생이 옷장 문을 열었다. 삐걱, 하고 경첩이 내는 소리가 그날따라 유난히 크게 들렸다. 옷장 안에는 어머니의 옷들이, 그녀가 떠나던 날 아침 그대로 걸려 있었다. 무채색의, 단정하고 실용적인 옷들. 그 옷들 속에서 어머니의 고단했던 삶의 궤적이 읽히는 듯했다.

muffler.png 빛바랜 연한 갈색의 캐시미어 목도리

동생의 시선이 옷장 문 안쪽에 걸린 목도리 몇 개에 머물렀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망설이듯 손을 뻗어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어머니가 유독 좋아하시던, 빛바랜 연한 갈색의 캐시미어 목도리였다. 내가 첫 월급을 타서 사드렸던 선물. 가장자리의 술은 몇 가닥 닳아 있었고, 표면에는 세월의 흔적처럼 자잘한 보풀이 일어나 있었다. 동생은 목도리를 두 손으로 받아 들고는, 잠시 얼굴에 가져다 댔다. 눈을 감은 동생의 속눈썹이 작게 떨렸다. 어머니의 체취를, 그 마지막 온기를 찾으려는 듯한 그 간절한 몸짓에, 나는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동생은 천천히 목도리를 목에 둘렀다. 그리고는 옷장에 붙은 낡은 전신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동생이, 목도리를 매만지며 고개를 살짝, 아주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빛의 각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기억의 장난이었을까. 거울 속 동생의 얼굴 위로, 어머니의 얼굴이 스치듯 겹쳐졌다. 목도리를 두르고 멋쩍게 웃으시던 그 표정, 우리를 바라보던 그 특유의 따뜻하고 서글픈 눈빛. 그것은 단순한 닮음의 차원이 아니었다. 그 찰나의 순간, 동생은 어머니 그 자체였다.


“엄마.”


나와 동생의 입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같은 단어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부름이 아니라, 확인에 가까운 탄성이었다. 동생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며 손으로 입을 막았고, 그렁그렁 맺힌 눈물 때문에 거울 속 풍경은 이내 흐릿하게 번져나갔다. 나는 울지 않았다. 대신 숨을 참았다. 내 눈앞에, 살아있는 어머니의 유산이 서 있었다. 동생은 내게 남겨진, 어머니의 가장 따뜻한 흔적이자 가장 선명한 기억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서, 서로의 목소리에서 어머니를 발견하며, 앞으로의 시간을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6. 끝나지 않은 멜로디


두 자식의 울음은 결코 독창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음색과 박자로 시작되지만, 결국 같은 주제를 향해 흘러가는 합창이다. 누군가 한 소절을 놓치면 다른 누군가가 조용히 이어받는다. 그렇게 한 곡이 끝나고, 또 다음 곡이 시작된다. 그 노래의 제목은 언제나 같다. ‘엄마가 섬그늘에’.

melody.png 끝나지 않은 멜로디

우리는 그 노래를 오래, 아주 오래 함께 부를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나고, 우리의 얼굴에 주름이 깊어지고, 아버지마저 우리 곁을 떠나시는 날이 온다 해도. 동생과 나는 서로의 거울이 되어, 서로의 기억을 확인하며 이 노래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할머니를 닮은 고모의 얼굴에서, 할머니의 습관을 닮은 아빠의 손짓에서, 이 끝나지 않은 멜로디를 희미하게 따라 부를 때쯤, 우리는 비로소 울음 뒤의 옅은 웃음을 지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그렇게 또 다른 세대로 이어져 영원히 살아 숨 쉴 테니까.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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