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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Jul 21. 2023

김치 플렉스

전업주부 경력 27년 차이지만 집안일은 여전히 힘들다. 아니 좀 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하기가 싫다. 한 해 한 해 주부경력이 더해지고 아이들도 다 커서 집안일이 많이 줄었는데도 점점 더 꾀가 난다. 그중에서도 하기 싫은 집안일 Top 3를 꼽아보자면 첫째는 화장실청소, 둘째는 다림질, 셋째는 김치담그기이다.(베스트 3를 선정하려니 냉장고 청소, 빨래 걷어서 개기, 계절 바뀔 때 옷장 정리하기 등등 사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일들이 줄줄이 떠오른다.)          


화장실 청소와 다림질은 그렇다 치더라도 김치담그기에 대해서는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남편과 한달만, 아니 일주일만 같이 살아보면 내가 왜 김치담그기를 힘들어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나에게 김치담그기는 그 어떤 일보다도 가장 힘들고 하기싫은 일이다.    

  


    

내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김치찌개이다. 남편의 김치찌개 사랑은 다른 어떤 음식으로도 대체 불가하여 친정엄마는 둘째 사위가 온다고 하면 씨암탉 대신 김치찌개를 차려내신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그 많은 맛난 먹거리들 속에서도 남편은 언제나 꿋꿋하게 김치찌개를 고른다.     

     

우리 집 저녁밥상의 제일 가운데 자리는 당연히 김치찌개가 차지하고, 그 옆에는 요리되지 않은 그냥 김치가 또 놓인다. 그것도 배추김치와 파김치, 또는 배추김치와 깍두기, 배추김치와 오이김치처럼 두가지 정도의 김치가 올려지는데 물론 매 끼니 김치찌개와 함께 깨끗하게 비워진다. 어쩌다 피자나 치킨을 배달시켜도 도착시간에 맞춰 남편은 김치부터 꺼낸다.

         

이런 남편의 못 말리는 김치사랑 때문에 나는 지금껏 김치지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아직까지 김장은 시어머니께서 해주시고 있지만(그래서 나는 겨울이 좋다.) 김장김치가 떨어질 때쯤부터 거의 2~3주에 한번씩 김치를 담그고 있다. 심지어 3년 정도의 외국생활 중에도 2주에 한번씩은 꼬박꼬박 마트 두 세 군데를 돌며 우리나라 배추 크기의 삼분의 일도 안되는 배추를 6포기씩 사서 김치를 담갔었다. 자기들은 잘 먹지도 않는 채소를 몽땅 쓸어담아가는 동양여자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시선이 몹시 불편했지만, 한번도 김치를 떨어뜨린 적이 없었다. 아마도 그동안 김치 담근 횟수로만 따진다면 나는 거의 김치장인 수준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름철, 특히 장마철이다. 여름 배추는 보통 싱싱하지도 맛있지도 않다. 아니 그보다 배추를 사기도 어렵다. 몇 군데의 큰 마트를 돌아 어쩌다 두 세 포기 발견하면 거의 '심봤다'는 심정으로 싹쓸이 해오는데 그나마도 죄다 벌레 먹은 것들이어서 검은 점들이 박힌 이파리를 떼어내고 나면 얼마 남지도 않는다.

          

며칠 전부터 식사때마다 점점 바닥을 드러내는 김치통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날은 덥고 배추도 시원찮은데 김치러버 남편은 꼬박꼬박 집에서 저녁을 먹으니 어쩔수 없이 또 김치를 담가야 한다.  

  

이쯤되면 ‘그냥 사 먹으면 되지’ 싶겠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내세울 거라고는 ‘알뜰함’밖에 없는 27년 차 전업주부이고, 거기에다 김치사랑이 아들보다 한 수 위인 시어머니는 넘치도록 많은 고춧가루와 마늘을 보내주시며 남은 양으로 며느리가 얼마나 살림에 충실한지를 확인하시니 김치를 사먹을 마땅한 핑계거리가 없는 것이다. 나 역시 비용도 부담스럽고, 김치를 사먹으면 왠지 주부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들어 늘 직접 담갔다.

 


미루고 미루다가 먹던 김치가 마지막 한 접시쯤 남았을 때 숙제를 안고 마트에 갔다. 어쩐 일인지 제법 멀쩡해 보이는 배추가 3포기나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일단 카트에 전부 쓸어 담았지만, 배추를 구했다는 기쁨과 하기 싫은 마음이 팽팽히 맞섰다. 마트를 한바퀴 돌고 다시 배추를 꺼내놓고, 또 한바퀴 돌고 다시 담고를 반복하다가 결국 사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김치를 주문했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주문버튼을 누르면서도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닌데 마음속으로는 김치를 직접 담글 수 없는 백만가지 이유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요즘 직접 김치 담가 먹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27년이나 했으면 됐지!    

 

직접 담그는 것보다 돈이 거의 열 배는 더 들었고, 시어머니가 아시면 앞으로 뵐 때마다 잔소리를 들어야 하겠지만 막상 주문을 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그리고 드디어 김치가 왔다. 더위 걱정이 무색하게 스티로폼 박스에 얼음팩까지 넣어 꼼꼼하게 포장되어 잘 도착했다. 김치를 김치통에 옮겨 담는데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배추를 다듬고 씻고 절이고 양념을 만들어 버무리고 뒷정리를 하는 데까지 몇시간이나 걸리던 일이 단 10분 만에 끝나는 신세계라니!  

   

야호, 숙제를 끝냈다. 이렇게 편하고 좋은 것을... '김치를 사먹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27년만에 깨달았다. 나도 이제 좀 편하게 살아야겠다. 27년 만의 안식년에 나를 위한 플렉스, 제대로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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