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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Dec 14. 2023

로또남편


우스갯 소리로 남편과 로또의 공통점은 절대 안맞는거라는데, 내 남편은 그야말로 5주째 당첨자가 나오지 않아 누적 당첨금이 어마무시하게 쌓인 로또이다.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는 나와 다르게 남편은 도대체가 기분변화가 없고 재미가 없다. 아니 기분 변화가 없는게 아니라 내 기분을 전혀 맞춰주질 못한다.


며칠전 남편 사촌동생이 사무실을 열어 개업식에 갈 일이 있었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좋은 일이니 나도 함께 가서 축하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남편은 그날 아침까지도 같이 가자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사실 사무실이 멀기도 하고, 또 나가려면 차림새도 신경써야하니 살짝 귀찮기도 해서 나도 갈까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선심쓰듯 "나도 같이 갈까?" 했는데 남편은 "뭐하러 같이 가."하고 대답했다. 순간 마치 데이트 신청을 거절당한 것처럼 민망함과 서운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나도 귀찮지만 혼자 가면 심심할까봐 큰맘먹고 같이 가줄까 한건데 막상 내 호의를 거절당하니 기분이 몹시 상했다. 그리고나서 바로 남편은 "가고 싶으면 같이 가든가."했다. 누가 가고싶어서 그러나? 이미 내 기분은 망쳐질대로 망쳐진 다음이라서 "갈 필요 없으면 안가!"하고 말해버렸다.


© thejohnnyme, 출처 Unsplash



남편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을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남'안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다. 신혼여행을 다녀와 처음 출근했던 날,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의 양복 자켓을 받아주려고 하자 남편은 괜찮다고 거부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하려고 하는 기특한 남편인데도 그때는 그게 너무 서운했다. 그리고 그 서운함은 지금까지도 간혹 나에 대한 남편의 애정을 의심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또, 남편은 내가 외출해서 밤늦게 돌아오지 않아도 절대 전화를 하지 않는다. 오랜만의 외출이니 자기 신경쓰지 말고 편하게 놀다오라는 배려라고 하지만 나는 그것도 좀 서운하다. 같이 있는 친구들은 남편과 아이들이 번갈아가면서 전화를 해대는데 내 휴대폰만 잠잠하니 참 민망하고 뻘쭘하다.


남들은 아내를 귀찮게 하지 않으니 얼마나 좋은 남편이냐고 하지만 부부라는 게 뭔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해주는 관계여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나는 나를 살펴주지도 않고, 내 손길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남편에게 늘 서운했다.


그렇게 혼자 나가버린 남편 때문에 마음이 상해 하루종일 기분이 언짢았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남편이 너무했어'와 '내가 너무 과한 건가'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콩알만했던 서운함이 어느새 주먹만큼 커졌다.




그날 저녁, 남편이 문앞에 놓인 택배박스를 들고 들어왔다. 나는 주문한게 없어서 왠 택배인가 했는데 내것이라며 건네주었다. 박스를 열어보니 가죽장갑이 들어있었다. 며칠전 외출하며 10여년 전에 남편에게 선물로 받았던 가죽장갑이 닳아 검지손가락 부분에 가죽이 벗겨졌다고 보여줬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다가 딸아이를 시켜 인터넷으로 장갑을 주문한 것이었다.



"어머 장갑이네."

"내가 당신이 말하는 건 꼭 기억하고 있지."


참나, 하루종일 꽁해있던 기분이 맥 없이 풀리고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왔다. 집에 돌아오면 27년간 묵혀온 서운함을 구구절절 풀어놓을 참이었는데, 타이밍 한번 기가 막혔다.



사실 27년을 함께 살아보니 남편이 표현은 안하지만 속 정이 깊은 사람이라는 걸 알겠다. 하지만 나는 보이지도 않는 '속 정'보다 충분히 표현해주는 '겉 정'을 훨씬 더 원하는 사람이다. 구멍난 장갑을 다시 사주는 것보다, 저녁 먹고나서 설겆이를 대신 해주는 것보다, 나른한 오후에 같이 산책을 나가자고 말해주고,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보고 싶었다고 말해주기를 훨씬 더 바라는 사람이다.


딸아이는 가끔 나를 보고 "엄마는 참 다루기 쉬운 여자야."라고 한다. 따뜻한 말 한마디로 기분만 맞춰주면 신이 나서 간 쓸개 다 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딸애는 아는데, 남편은 모른다. 아니 정말 모르는 건지 알면서도 그러는 건지 잘모르겠다. 나는 '함께 알콩달콩' 살기를 원하는데 남편은 '각자 알아서' 살기를 바란다.


사람은 절대 바꿀 수 없다더니 남편에게 표현하는 법을 가르쳐보려고 27년을 노력했는데도 안바뀌는 걸 보면 안되는 건 안되는 건가보다. 하기야 이제 그만 포기할 때도 됐는데 내 마음을 몰라주는 남편 때문에 아직도 속을 끓이고 있는 나를 봐도 사람은 진짜 안바뀌나보다.


절대 맞지 않는 로또 남편은 그날 저녁 나에게 가죽장갑을 안기고는 자신이 꽤 자상한 남편이 된 것 마냥 아주 뿌듯해했다. 남편 입장에서는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를 표현한 것이니 나도 그 마음을 고맙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왜 내마음이 채워지지 않는건지... 아무래도 내가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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