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이디 May 21. 2024

그걸 꼭 말로 해야 돼? vs 말로 해야 알지!

딸아이가 어버이날 선물로 준 디카페인 커피를 처음 개봉해서 내렸다. 애들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 내가 고른 거 말고도 딸애는 맛있는 커피라며 또 하나를 선물했다. 커피를 내리면서 내 머리속으로는 이미 딸내미한테 보내줄 인증샷과 카톡에 쓸 문구를 생각하고 있었다. 커피가 맛이 있든 없든 내가 전할 말은 똑같았다.

- 커피 너무 맛있네

- 울딸 사랑이 담겨있어서 더 맛있는거지~~


다행히도 커피는 맛이 있었다. 맛이 깊으면서도 부드럽고 내 입맛에 딱이었다. 아니 이미 나는 커피를 맛있게 먹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엄마를 생각하며 커피를 이것저것 찾아보고 골랐을 아이를 생각하면 어떻게 맛이 없을 수 있겠나. 더군다나 사랑 표현이 가득한 예쁜 카드와 함께 받았는데.



나는 표현이 많은 사람이다. 아니 표현을 많이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전형적인 T에 낯간지러운 건 못견디는 나지만, 좋은 건 좋다고 하고 고마운 건 고맙다고 표현하는 건 사람 사이에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더구나 좋다고 잘했다고 고맙다고 당신이 최고라고 말하는데 힘이 드는 것도 아니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왜 표현을 아끼는지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단팥빵 사왔지"

"자기가 설겆이를 도와주니까 너무 편하다."

...

"당신처럼 모른 척 하려고 해도 나는 그게 안돼. 사랑하는 사람인데 신경이 쓰이는게 당연한 거 아냐?"


나는 일상에서의 자잘한 일에도 표현을 하는 건 물론이고 싸울 때조차도 남편의 기분을 생각하며 말을 한다. 남편도 그래 주기를 바라지만 남편은 매사에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이다. 내가 허리가 아파서 엉거주춤하며 걸어 다녀도 좀 어떠냐고 묻지 않는다. 내가 걷는 폼을 보고 많이 아프구나 하고 '생각'만 한다. 대신에 청소기를 돌려준다.


큰애 대학입시 때 수시 논술고사 마지막 시험을 들여보내고 집으로 혼자 돌아오는 길에 허탈한 기분에 처음으로 내 손으로 소주를 한병 사가지고 왔었다. 긴장이 풀어져서였는지 소주를 한잔 마시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미처 화장실로 피할 틈도 없이 쏟아져버린 눈물에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는데, 함께 저녁을 먹던 남편은 내가 다 울도록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리고는 내가 울음이 잦아들자 조용히 부엌으로 가서 설겆이를 했다.


남편의 위로를 바라고 일부러 울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상황이면 보통의 남편들은 아내의 어깨를 쓸어주며 고생했다, 울지마라 정도의 말은 하지않나? 아마도 남편은 위로의 말보다 설겆이를 해주는 것이 나에게 더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당신은 내가 죽으면 울까?"

"... 왜울어? 안울지!"


남편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목말라 투정을 섞어 어깃장을 놓았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나를 더 열받게 했다. 사실 아주 가끔은 정말로 궁금했다. 나에게 정말로 애정이 있기는 한건지, 내가 먼저 죽으면 그리워하기는 할까 하고. 내가 이렇게까지 생각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남편은 밖에 나가서 남들에게는 배려가 넘치고 표현도 잘한다.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유독 나한테만 인색하다.


내가 주는 커피를 마실 때는 한마디도 안하던 사람이 한번은 아이가 내려준 커피를 마시면서는 몇번씩이나 맛있다고 말했다. 커피가 얼마나 맛이 있길래 그러나 싶어 나도 먹어봤는데 맛이 별다르지 않았다.

"내가 줄 때는 왜 한번도 맛있다고 안하는데?"

"당신은 당신이잖아. 뭘 말로 해"


한참을 생각했다. "당신은 당신이잖아... 당신은 당신이잖아... 당신은 당신이잖아..." 무슨 의미일까?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겠어서 언니에게 얘기했더니 '남편이 나를 제2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라고 해석해 주었다. 나를 자신과 똑같다고 생각해서 표현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겠냐고.


다 필요 없다구! 내가 왜 자기야? 나는 난데. 나는 좋다는 말을 들어야 좋은 줄 알고,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 진짜 고마워하는 줄 알고, 사랑한다고 말해줘야 나를 사랑하는 구나 하고 아는 사람인데... 사람들은 말보다 행동이 더 중요하다고 하지만 나는 남편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듣고 싶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당연하지, 그럼 말로 안하는데 어떻게 알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남편의 흰머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