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올해 우리 나이로 60살이다. 59까지도 별 느낌이 없었는데 60이라고 하니 갑자기 너무 늙어버린 것 같다. 내가 60살 할아버지(예전에는 60이면 분명히 할아버지였다)와 살고 있다니. 총각시절부터 이마가 M자형으로 대머리인듯 아닌 듯 아리까리 했지만, 눈에 콩깍지가 씌어있던 나는 그의 넓디넓은 앞이마는 외면하고 머리숱이 수북한 뒷통수만 보았던 것 같다.
그런데 몇년전부터 남편의 귀 옆에 나있는 희끗희끗한 흰머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28년 동안 M자가 조금씩 더 패여가고는 있지만, 30년만의 대학 동아리 모임에서 죄다 대머리가 되어 나타난 남자 동기들을 만나고 온 다음부터는 그 정도의 M자는 너그럽게 품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흰머리는 달랐다. 그렇지 않아도 곱슬인 머리카락이 나이가 들면서 더 가늘어지고 더 꼬불꼬불해져서 달라붙는데다가 귀 옆을 하얗게 덮고 있으니 더 늙어 보였다. 물론 이제는 머리카락이 있고 없고보다 내 옆에 살아있는게 더 중요한 나이가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젊어보이게 하고싶어 줄곧 염색을 권해왔다.
요즘은 남자들도 예뻐지기 위해 메이크업은 물론이고 피부과 시술까지 받는다는데, 남편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머리가 검어진다고 다시 젊어지는 것도 아닌데 자신은 자연의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늙어가겠단다. 흰머리 때문에 더 나이들어 보인다고 아무리 말해도 내말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흰머리를 커버할 수 있을만큼 스타일이 좋은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 뭘 믿고 염색을 안하겠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 나도 외모에 별로 신경쓰는 편이 아니다. 예뻐지고 더 젊게 보이려면 부지런히 외모를 가꾸어야 하는데 그 부분에서만큼은 욕구보다 귀찮음이 앞선다. 또, 이제까지 살면서 남편에게서 내 외모에 대한 지적을 받아본 적이 한번도 없다. 물론 예쁘다는 칭찬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어쩔 때는 내가 보이기는 하나 싶을 정도로 남편은 내 외모에 무관심하다. 그렇다보니 나도 점점 더 내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요즘 한참 빠져서 보고있는 드라마 속에서 부부인 남녀 주인공이 서로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키스를 하려고 하고 있었다. 아내의 머리를 넘겨주며 서서히 다가가는 남자 주인공을 보다가 가슴이 간질거려 고개를 잠깐 옆으로 돌렸다. 쇼파에 누워 졸고있는 남편의 흰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주 잠깐 남편과 키스를... 상상하다가 아뿔사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런 할아버지랑 무슨...
다행히도 나는 무척 객관적인 사람이다. 남편이 드라마 속 여주인공을 보다가 한쪽 눈꺼풀이 처지고 팔자주름이 깊게 진 내 얼굴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나에게 키스를 하려고 다가오다가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비어 속이 훤히 보이는 내 정수리를 본다면? 에잇! 나만 억울한 건 아닌 것 같다. 남편이 졸고 있으니 다행이다.
남편의 흰머리가 거슬리는 건 남편이 늙어보이는게 싫어서가 아니라, 그를 보면서 내가 늙어가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싫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남편은 나의 외모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내가, 또 자신이 늙어가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보다 훨씬 성숙한 사람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