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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May 31. 2024

화성보다 먼 조선에서 온 남자

오늘도 남편의 방 문은 굳게 닫혀있다. 싸웠냐고? 아니다. 싸우기는커녕 최근 들어서는 딱히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 그럼 사이가 안좋으냐고? 음...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나는 25년째 우리가 문제있는 부부라 생각하고 있지만, 그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평범한(지극히 정상적인) 부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몇 년도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출판된 적이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뇌 구조부터가 달라 ‘도대체 왜?’라는 의문을 갖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냥 남자는 그렇고, 여자는 이러니 더 이상 캐려고도 바꾸려고도 하지 말라는, 어느 한쪽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으니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남자의 특성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했었던 기억이 난다.    


 

화성에서 온 남자... 화성이 어딘지는 몰라도 시간적으로는 현재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기라도 하지, 내 남편은 그야말로 딱 조.선.시.대. 남.자.다. 공감능력과 표현능력 면에서 그렇다. ‘능력’이라고 인정해 줄만한 구석이 1도 없다. 그런 남자와 두 번의 만남 후에 헤어졌다가 3년 후 다시 만나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된 이유는 두 번째 만났던 날 그가 수줍어하며 했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정작 그는 기억도 못한다)

 

“지난 번에 만나고 집에 돌아가 누웠는데 자꾸 생각이 나면서 내 인생에 마지막 여자가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번째 만남에서 마지막 여자가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말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표현능력이 없냐고? 그러니까 나도 속았다. 두 번째 만남에 고백 비슷한 말을 들었던 나는 오히려 급하게 다가오려는 그가 너무 부담스러워 서둘러 일어났었다. 하지만 결국 그 말 한마디를 잊지 못해 3년만에 내가 먼저 다시 연락을 하게 되었다. 그떄부터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남편은 집안에서 혼자 있을 공간을 찾아 다닌다. 아이들이 집을 비우는 날이면 그 방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큰아이가 2~3주씩 합숙을 들어가면 남편도 그 기간동안 아이 방을 자신의 동굴로 만들어 버린다. 아이방으로 베개를 들고 들어가는 뒷모습이 나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를 아무리 얘기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걸 싫어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도리어 이 나이에 자기에게 뭘 기대하느냐고 성을 낸다.


그가 동굴에서 나오지 않는 동안에는 내 마음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간다. 어디에서부터 길을 잃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건지, 과연 끝이 나오기는 하는건지, 헤매고 헤매다가 그 시작점을 어렴풋이 찾아냈다.


© sandym10, 출처 Unsplash


결혼관의 차이였다. 남편에게 결혼은 가족을 이루는 것, 즉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까지였고, 나는 그 이후를 위해서 결혼을 선택한 것이었다. 남편이 지향하는 결혼은, 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손을 잡고 걸어가는 백발 노부부의 뒷모습이 결혼의 유일한 로망이었던 나와는 너무 달랐다. 남편이 꿈꾸었던 결혼은 나에게는 그저 '생활'이었고, 내가 꿈꾸었던 결혼은 남편에게는 '판타지'였다.


조선시대에서 온 남자는 한 눈 팔지 않고 성실하게 가족들을 먹여살린 것에 대해 스스로를 아주 대견스러워 한다. 그리고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지금, 자신만의 휴식을 원한다. 물론 그 휴식안에 21세기를 살고 있는 여자는 들어있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시대를 살아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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