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숙소로 일찍 돌아와 많이 쉬어서 그런지 몸은 한결 나아졌다. 약간의 어지러움 증상은 남아있었지만, 스위스에서의 일정이 하루밖에 남지 않아 더 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날씨 때문에 숙제처럼 남아있던 융프라우를 보고와서 마음이 훨씬 가벼웠다.
오늘은 어제 융프라우에 가느라 정상을 가지 못했던 피르스트에 다시 가기로 했다. 산의 중턱에서 본 피르스트도 그 정도로 멋있었는데 정상은 얼마나 더 멋질까 잔뜩 기대를 가지고 그린덴발트로 향했다. 우리가 인터라켄에 도착한 이후로 날씨가 계속 좋았다. 어제 그렇게 서둘러서 융프라우를 가지 않고 오늘 올라갔어도 괜찮았을 뻔 했다. 이 곳에 며칠을 머물러도 날씨 때문에 융프라우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우리에게는 날씨 운이 따라주는 것 같다.
인터라켄 동역에서 또 그린덴발트로 가는 기차를 탔다. 어제 한번 가봤던 곳이라서 피르스트로 가는 케이블카 정류장을 잘 찾아갔다. 화창한 날씨 때문인지 정류장에는 어제보다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매표소에는 현재 이용가능한 액티비티와 소요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다. 날씨 때문이었는지 어제는 CLOSE로 표시되어 있던 플라이어와 글라이더도 오늘은 운영되고 있었다.
케이블카 안에서 내려다 보이는 경치는 어제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푸른 언덕에 듬성듬성 붉은 지붕의 집들이 있고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소들도 보이고, 마치 그 집들 어딘가에 진짜 하이디가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공중에서 흔들리는 케이블카를 25분간 타는 건 역시나 쉽지 않았다. 어제의 어지러움이 아직 남아있어서 속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겨우 정상에 도착했는데 속이 메스껍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산 위에는 큰 나무가 없어서 앉아서 쉴 수 있는 그늘도 없었다. 정류장 처마 밑 얕은 그늘에서 잠시 쉬었다가 피르스트를 둘러보았다. 역시나 경치는 예술이었다. 하늘 아래 이런 곳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림같은 풍경이었다. 피르스트 정상에서 제일 해보고 싶었던 클리프워크를 하러 갔다.
클리프 워크는 절벽에 둘러쳐져 있는 난간을 따라 걷는 것이다. 발 아래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그대로 내려다 보이는 절벽길을 걷는데 생각보다는 무섭지 않았다. 무서워서 안하겠다는 아이를 두고 혼자서 걸었다. 어차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높이라서 무섭다는 생각도 별로 안들었지만, 아주 잠깐은 만약 이런 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그렇게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다. 놀다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도 웃고 있지 않을까?
절벽의 완전 끄트머리 난간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어서 사진은 포기하고 플라이어 탑승장으로 갔다. 그런데 대기 시간이 약 120분! 머리는 어질어질하고 속은 울렁거리는데 뙤약볕에서 도저히 두 시간을 기다릴 자신이 없어 아쉽지만 포기하고 돌아섰다.
내가 이제까지 차 멀미, 배 멀미는 해봤지만 케이블카 멀미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시스템의 문제인지 케이블카가 움직이다 멈추다를 반복하며 25분을 내려가는데 너무 힘들어서 식은 땀이 났다. 우리가 탄 케이블카에 제발 아무도 타지 않기를 바랐지만, 다음 정거장에서 왠 잘생긴 청년 두 명이 올라탔다. 점점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얘지고 자칫 아침메뉴를 공개하게 될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기지(자세한 내용은 생략)를 발휘하여 겨우 국제적 망신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시 기차 타고 버스 타고 숙소로 돌아와 그대로 쓰러졌다. 어제 피르스트에서 패러글라이딩 하는 것을 보고 반해버려 그 자리에서 딸내미와 패러글라이딩을 예약했는데,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내 예약은 취소했다. 산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경치가 이렇게 아름다운데 하늘에서 보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싶어 패러글라이딩을 꼭 해보고 싶었는데 무척 아쉬웠다.
내가 숙소에서 쉬고 있는 동안 아이는 패러글라이딩을 하러 갔다. 두 시간쯤 쉬고나니 어지러운게 좀 가라앉아 아이와 만나서 저녁을 먹기 위해 인터라켄 서역으로 걸어갔다. 혼자서 천천히 산책을 하며 기념품을 구경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귀에 익은 사물놀이 소리가 들려왔다. 역 앞 광장에서 우리나라 젊은 이들이 신나게 사물놀이판을 벌이고 있었다.
낯선 곳에서 듣는 익숙한 소리가 반가우면서도 어색했다. 평소 사물놀이를 좋아하는데도 왠지 이 곳에서는 고요함을 깨는 것 같아 살짝 거슬렸다. 그래도 고생하는 동포 젊은 이들의 사기를 돋워주기 위해 지갑에서 동전을 찾고 있는데 아이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이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멀미를 해서 숙소까지 혼자서 못가겠으니 데리러 오라고 했다. 누가 내 딸 아니랄까봐 애미는 케이블카 멀미, 딸은 패러글라이딩 멀미, 참 가지가지였다. 아이가 무슨 공원에 있다는데 이곳의 공원은 어지간하면 올림픽공원의 반만한 크기이니, 공원에서 아이를 찾는 일이 그야말로 모래사장에서 금반지 찾기쯤 되었다.
대강 아이에게서 주변에 보인다는 간판과 건물 모양을 듣고 찾아나섰다. 아무리 공원이 넓어도 엄마는 자기 아이를 알아보게 되는지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화단턱에 누워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를 벤치로 옮겨 잠시 누워있게 하고 양산을 펼쳐 햇볕을 가려주었다. 지나가면서 괜찮냐고 묻는 친절한 사람들에게 Ok, Thank you를 반복하며 한참을 앉아있었다. 그 와중에도 벤치에 앉아서 보는 풍경은 참 아름다웠다.
엄마와 딸내미가 듀엣으로 멀미를 하는 바람에 저녁 메뉴가 퐁듀에서 누룽지로 바뀌었지만, 둘이 손을 꼭 잡고 함께 숙소로 걸어왔던 그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내가 만약 혼자서 여행을 왔더라면... 그래도 함께 있어서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