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라켄에 와서부터는 아침에 일어나면 날씨부터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특히나 웹켐으로 융프라우와 피르스트의 날씨를 확인해야만 그날의 계획을 세울 수가 있었다. 창밖으로 산 자락에 두꺼운 구름이 끼어있는게 보였다. 예상대로 융프라우요흐와 피르스트는 아무것도 안보이는 상황이었다.
융프라우는 그렇다 쳐도 피르스트에 가는 것까지 미루다보면 자칫 아무것도 못하고 시간만 지나버릴 것 같아 그냥 피르스트에 가기로 했다. 피르스트에서는 액티비티를 할 예정이어서 혹시 날씨 때문에 멋진 경치는 못보더라도 액티비티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피르스트에 가기 위해서 우선 기차를 타고 그린덴발트로 갔다. 그린덴발트는 인터라켄보다 산이 훨씬 가까이 보였다. 그린덜발트를 잠깐 돌아보고 피르스트로 가는 곤돌라를 타러 갔다. 피르스트 정상까지는 곤돌라를 타고 25분을 올라가야 했다. 곤돌라 25분은 보통의 기차나 버스 25분과는 체감되는 시간이 달랐다. 더욱이 구름이 잔뜩 끼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곤돌라 안에서의 25분은 무척 길게 느껴졌다.
산악카트를 타기 위해 중간 정거장인 쉬렉펠트에서 내렸다. 그 멋지다는 피르스트가 구름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비까지 간간히 뿌려 공기도 무척 차가웠다. 달달 떨면서 구름 속을 날으는 패러글라이딩을 구경하며 한시간쯤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게 지루해질 때 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직원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눈사태가 나서 산을 타고 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는게 보였다. 한 여름에 눈사태라니 스위스에서만 볼 수 있는 장관이었다.
우리 순서가 되어 표를 사려는데 QR코드를 찍어서 안전수칙에 동의해야 한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뒷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게 되어 당황하니 더 버벅거렸다. 나도 혼자서 충분히 할 수 있었는데 딸내미와 주변의 한국 청년들이 나서서 도와줬(참견을 했)다. 기분이 별로였다.
그사이 구름이 차츰 걷히면서 눈앞에 산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융프라우보다 피르스트가 훨씬 더 멋있었다는 사람들이 많더니 그야말로 믿을 수 없을만큼 멋진 풍경이 펼쳐졌다. 마치 내가 사는 곳과 같은 지구상에 있는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멋진 경치 구경에 스릴까지 넘치는 산악 카트는 그 어떤 놀이기구보다 신나고 재미있었다. 자칫 조종을 잘못하면 비탈길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는 길을 달려야 하지만, 너무나 멋진 경치를 안보고 앞만 보며 탈 수는 없어서 경치 구경하랴 카트 조종하랴 무척 바빴다. 산 중턱에 하이킹을 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다. 내일은 나도 꼭 한번 해봐야지 생각하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피르스트 날씨가 개었으니 융프라우도 좋아졌을 것 같아 웹캠을 확인하니 정상이 선명하게 보였다. 흔치 않은 기회에 열 일 제쳐놓고 융프라우로 갔다.
융프라우요흐에 가기 위해서는 그린덴발트 터미널로 내려와서 아이거 익스프레스 케이블카를 타고 아이거글렛처 역까지 가서 다시 산악열차로 갈아타야 했다. 아침에 날씨가 흐려서였는지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서 보이는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 산악열차로 가면서도 멋진 풍경을 기대했는데 융프라우요흐역으로 가는 마지막 산악열차는 내내 터널속으로만 갔다. 100여년 전에 아이거 산과 묀히 산을 뚫어서 16년간의 대공사 끝에 터널을 만들어 열차를 운행하게 되었다니 참 경의롭게 느껴졌다.
융프라우요흐 역 한정거장 전인 아이스메어 역에서는 5분간 정차해서 창문을 통해 잠깐 알프스산을 구경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눈으로 덮힌 산이 멋지긴 했지만 이미 멋진 풍경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에 창문을 통해서 보는 산은 감동이 덜했다.
드디어 융프라우요흐 역에 도착, 사람들이 많이 구경하는 얼음동굴을 패스하고 바로 융프라우 정상으로 나갔다. "와~~" 파란 하늘아래 눈 덮힌 봉우리, 그 아래로 눈같기도 하고 구름같기도 한 넓은 눈 밭이 펼쳐져 있었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3454m라는 높이가 실감나지 않았다. 높이만이 아니라 모든게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융프라우요흐의 날씨는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눈도 많이 녹아서 내가 기대했던 온통 하얀 세상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지구온난화의 영향인 것 같았다. 머지않아 이곳에서도 더 이상 만년설을 볼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다. 쓰레기를 줄여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오래도록 유지시켜야 한다는 무한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융프라우에서 또 기대되는 한가지, 신라면을 먹으러 갔다. 이곳에서 감동적인 라면 맛을 경험하기 위해 그동안 한국에서 싸가지고 온 라면도 먹지 않았었다. 그래서 라면 맛은? 그냥 라면 맛이었다. 그렇게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고산병까지는 아니어도 머리가 아프기 시작해서 급하게 먹고 내려왔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던 것 같다.
급하게 먹은 라면이 체한 건지, 하루에 피르스트와 융프라우를 동시에 올라간 강행군이 문제였는지, 돌아오는 길에 속이 불편하고 어지러워서 결국 기차안에서 귀한 신라면을 모두 반납했다. 그때부터는 내가 무슨 정신으로 숙소까지 돌아왔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일생에 한 번 볼까말까한 맑은 날씨의 융프라우를 직접 볼 수 있었던 댓가치고는 꽤 가혹했다.
그토록 간절히 가보고 싶어했던 알프스산, 융프라우는 나에게 벅찬 감동과 그에 못지않은 괴로움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여러모로 잊지 못할 융프라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