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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희 Jun 22. 2023

아빠의 철탑

YellowSymptom 노란색 증상

 작가 생활을 하면서 이보다 더 짙은 체취를 뿜어낼 수 있는 날이 올까?

 나 자신에게도 솔직하지 못한 나에게 이 작업은 터질듯한 강렬함과 지독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주었으니 말이다. 누구에게도 표현하지 못했던, 하지만 누군가는 알아주길 바랐던 내 마음을 배설하듯 분출했다.  

 그리고 벌써 8년이 지났다.

YellowSymptom 노란색 증상


YellowPylon/ceramic, 전선, 작업등, 케이블타이/가변설치/2016




우연히 들린 철물점

 부산 기장에 있는 한 철물점이었다.

 우연히 아빠와 철물점을 들렸다. 험상궂게 생긴 공구들과 쇠냄새만 가득할 줄 알았는데, 아기자기하게 생긴 도구들과 노란색 물건들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적어도 내 눈엔 좋아 보이는 것들 뿐이었다.



 전선, 전구, 리드선, 작업등, 각종 공구들은 나에겐 그리 생소한 물건은 아니다.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전기 관련 일을 하고 계신 아빠 덕분에 우리 집엔 각종 공구들이 가득했었다. 어릴 땐 그런 것들이 무섭고 아빠를 힘들게 하는 물건이라 생각해 별로 친근하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성인이 되고 밥벌이를 해야 되는 나이가 되니 아빠의 때 묻은 공구들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여기에 있는 노란색 물건들로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




애정결핍

 나의 모든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는 '결핍'이다.

 모든 이들이 자신만의 결핍을 갖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20대 중반의 서정희는 애정이 갈급했다. 특히, 아빠에 대한 애정이 무척이나 필요했다. 이제는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나의 불안정함과 우울이 아빠 때문이라 여겼던 것 같다. 내가 보는 아빠는 본인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옆에 있는 이들을 외롭게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꼬는 버릇도, 뜯는 버릇도 모두 아빠 때문 일거라는 철없는 생각을 했고, 아빠를 너무 사랑했기에 미움도 커져갔다. 아빠에 대한 갈망만큼 흙을 꼬아댔고, 사춘기 예민한 소녀처럼 이유 없는 반항을 했다.


 난 그때 성인사춘기였다.

 죽어서도 한번은 꼭 걸린다는 수두처럼 사춘기는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온다. 또래에 비해 조숙하고 일찍 철이 든 편이었다. 어른스럽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그런 말들을 듣는 걸 좋아했다. 엄마에게 물어봐도 나의 사춘기 증상은 조용히 방문을 닫는 것과 친구들과 목욕탕을 갔던 것이 고작이었다. 그때 삼켰던 감정들이 괴랄맞게도 20대 중반에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 것이다.



 결핍의 부산물인 노란색 꼬인 유닛들을 삽으로 퍼담을 수 있을 정도로 만들었고, 일일이 낚싯줄에 꿰어 온 실기실에 주렁주렁 매달아 놨다.  



노란색 철탑

 철탑을 볼 때면 아빠생각이 난다. 아빠를 꼭 닮았다.

 앙상해 보이는 골조로 되어있지만, 무엇보다 단단하며 어떠한 비바람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또한, 위험한 상황을 대비해 철탑과 철탑사이 안전거리를 두어야 한다. 아빠를 상징하는 철탑에 전선을 사용하여 골조를 만들고, 그 사이사이에 나의 노란색 꼬인 유닛들을 치덕치덕 엮어준다.  



 완성된 작품은 아빠에게 엉겨 붙어 애정을 갈구하는 모습이 아닌, 아빠의 외로움과 빈 곳을 내가 채워주는 듯 보였다. 나는 아빠를 원망하고 미워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그를 간절히 사랑하고 있었다.

 오히려 아빠의 결핍을 채워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철탑 작업을 하는 내내 아빠 생각을 했다.

 아빠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당신의 삶은 어떨까? 가족은 어떤 의미인가? 그가 진정 바라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갔고, 명쾌한 해답은 얻을 수 없었지만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빠'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이기적이게도 나의 아빠로만 존재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나에게 항상 다정하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강했던 우리 아빠가 평범한 중년의 남성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YellowPylon/ceramic, 전선, 작업등, 케이블타이/가변설치/2016


 결국, 노란색 철탑은 아빠에 대한 얽히고설킨 애정의 산물이었다.


 유치하게도 그때의 나는 방황의 이유를 그저 누군가에게 돌리고 싶었고, 그 대상이 아빠가 되었을 뿐이었다. 아빠라면 모든 걸 이해해주고, 나의 어떤 모습도 미워하지 않으리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8년이 지난 이제야 알게 되었다. 아빠는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주셨다.

 

이 또한 그의 사랑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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