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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희 Aug 18. 2023

지하 첫 작업실

  고등학생 때까지 울산에 살다 서울로 올라와 처음으로 기거한 동네가 용산구 청파동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버릇이 잘 든 것 같다. 서울 모든 동네가 청파동 같을 줄 알았다. 서울 시내 웬만한 곳은 30분이면 갈 수 있고, 강남강북을 가르는 버스들이 이 동네를 지나갔다. 그동안 거리적 불편함 없이 지내왔던 것이다. 어영부영 흘러 흘러 도착한 이곳에 자리 잡은 지도 벌써 7년이 되었다.     


 사귄 지 반년밖에 안 된 남자친구(지금의 남편)에게 작업실을 같이 운영하자 꼬드겼다.

 참 무모했다. 어떻게 보면 서로에 대해 잘 몰랐을 텐데, 뭘 믿고 일을 저질렀나 싶다. 어쩌면 뭘 몰랐기에 도전할 수 있었겠지? 우린 대학원을 졸업하고 남자친구는 이천에서, 나는 홍대에서 각자 알바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돈으로 작업실을 시작했다. 심지어 너무도 뻔뻔하게 아빠에게 보증금을 보태달라고 했다!

 아주 효녀였지, 효녀였어.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40만원

 월세 저렴한 곳을 찾고 찾다 보니 서울 끝 도봉구까지 오게 됐다. 도봉구에 대한 첫인상은? 오일장이 열리던 내 고향 울산과 비슷한 느낌이라 꽤 정감 있게 느껴졌다. 남자친구의 집과 가깝기도 했고, 우리만의 공간이 생긴다는 생각에 들떠 큰 고민 없이 계약을 했다.       

 예산에 맞추다 보니 물품 구입이나 전기 공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직접 해야만 했다. 원래 운영하던 도예 공방을 인수받았는데, 그분이 외국으로 가신다며 본인 작품만 챙겨 몸만 나가셨다. 흙이나 오래된 쓰레기 정리하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냉장고 속 곰팡이 낀 김치 버리는 건 정말 최악이었다. 돈 없는 우리를 탓하며 눈물의 셀프 인테리어는 한 달 만에 끝이 났다.

 이제 진짜 우리의 첫 작업실이었다!     



 우리 작업실이 있던 거리에는 구축 빌라와 오래된 호프집, 승합차가 대기 중인 노래방들이 즐비했다. 서울에 할렘이 있다면 이곳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때 겪었던 요상스러운 일들을 얘기하자면 이틀 밤을 세도 모자랄 것이다. 환경이 그랬던 것뿐이지, 불행하지는 않았다.


 작업실 근처 편의점, 제법 쌀쌀했던 날 야외 의자에 앉아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아, 이런 게 행복이구나! 행복 별거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1층으로 올라와 쬐는 햇볕마저도 황홀한 정도였다. 또 어떤 날은 낯설고 생경한 장면에 ‘아, 내 인생이 이렇게까지 떨어졌구나.’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일희일비의 연속이었다.     


지하 작업실 계단에서 올라다 본 풍경


 돈이 없어 남자친구 집에서 몰래 쌀을 서리해오기도 하고, 차비가 아까워 30분이 넘는 거리를 매일 걸어 다니기도 했다. 그땐 마음이 허기져서 그런가, 헐거운 반찬에도 밥은 엄청 먹어댔다. 단골 상차림은 맨밥에 총각김치였는데, 그래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서 그마저도 낭만적이었다. 앞으로의 멋진 날들을 상상하며 ‘지금은 영화 속 한 장면에 지나지 않아.’라고 되뇌며 마음을 굳게 다지곤 했다.      


 작년 초, 지하 작업실에 문제가 생겨 떠밀리 듯 나왔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과 대출받은 돈을 합쳐 지상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당연히 인테리어는 또 셀프로 진행했다. 몇 년 사이 나이가 들어 힘든 건지, 지하에 오래 있어서 몸이 골골거리게 된 건지 억지로 에너지를 짜내가며 새로운 공방을 단장해 나갔다.



 비 오는 날 밖을 보며 마시는 커피가 그렇게 향그러운 줄이야. 빗소리와 음악 소리가 어우러져 감미롭게 들리기까지 했다.  새로 옮긴 작업실에서 색다른 작업도 시도해 보고, 해묵은 숙제였던 글 작업도 시작했다.      

 원래 첫 경험은 어설프고 쓰라리지 않은가.

 나라고 별 수 있었을까. 첫 작업실에서의 쌉싸름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첫사랑, 첫 키스, 첫 경험보다 더 짜릿하고 강렬했던 나의 첫 작업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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