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MY RED ZONE

잃어버린 취향을 찾아서

by 해피쏨



#6. 개인의 취향_ MY RED ZONE



해를 따지자면 13년이 지났다. 남편과는 대학시절 캠퍼스 커플로 만나 서로의 친구들과도 같은 세월을 함께 했다. 얼마 전 제주여행을 온 친구를 만나러 간 남편이 친구가 집으로 치킨을 보냈다며 내게 한 끼 해방 소식을 알려왔다. 30분 후 집에 도착한 치킨 봉지에 붙어있는 영수증을 보며 나는 다시 주소를 확인했다. 아이 둘, 어른 한 명뿐인 집에 치킨 두 박스라니!? 치킨박스를 열어보니 할라피뇨가 잔뜩 올려진 매운맛 치킨과 간장치킨이 각각 담겨있었는데, 순간 남편의 친구가 기억할 정도로 확고했던 나의 취향을 마주하곤 무언가 울렁였다. 한 때는 밥상 위 메인 반찬의 자리에 빠지지 않고 올랐던 청양고추장아찌는 냉장고에서 조차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순한 맛 라면을 먹을 때에도 맹물 2리터가 필요한 아이들과 청양고추를 바라만 봐도 땀샘이 열리는 맵찔이 남편 사이에서 나의 매운맛은 아스라이 사라졌다. 엄마와 아내가 되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따져보자면 이것은 다수결의 원리가 적용된 것에 가까웠다. 마트에서 장을 볼 때 재료구입의 기준은 ‘더 많이 필요한 재료’인데, 순한 맛 3명과 매운맛 1명의 구성원의 입맛을 충족시키기 위해 청양고추보단 오이 고추를 선택하고, 불닭 소스 라면 대신 짜파게티를 고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선택받지 못한 소수의 의견이 엄마이자 아내인 나였을 뿐.


텃밭이 생기자마자 빈 땅을 보며 한 일은 땅을 나누는 일이었다. 텃밭은 4평, 가족 구성원도 4명. 한 명당 한 평의 땅이 주어졌다. 오로지 나를 위한 1평이 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떨림이 느껴졌다. 이 순간 집중해야 하는 대상은 ‘나, 자신’이었다. 채소를 잘 먹지 않는 아이들은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고 다 자란 작물을 수확하는 새로운 텃밭놀이를 할 생각에 즐거워했다. 심어야 하는 작물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는 채, 알고 있는 작물의 이름을 마구잡이로 뱉어내는 모습이 마치 아이엠 그라운드 채소 이름 대기 놀이를 하는 듯했다. 자연스럽게 심고 싶은 작물이 많은 사람에게 많은 땅이 할당되었다. 암묵적 합의를 거쳐 처음으로 나를 기준으로 한 구매 목록이 많아졌다.

나의 텃밭 레드존


내가 처음으로 고른 작물은 적겨자다. 쌈 채소 중 매운맛을 지녔다는 이유로 우리 집 식탁에 오르지 않았던 아이. 매운맛의 최고봉 청양고추와 쓴맛이 나는 치커리와 레드 치커리도 심기로 했다. 화장품을 먹는 것 같다며 극도의 거부감을 보이는 다른 가족 구성원을 위해 멀리했던 허브들도 당당히 나의 땅에서 자리를 잡을 예정이다. 이렇게 나의 취향으로 가득 찬 2평 남짓한 텃밭이 완성됐다. 이름하야


"MY RED ZONE"


텃밭이 생기기 전에는 ‘씨 뿌리면 언제 키워서 언제 먹나. 그냥 사 먹을 걸 하며 후회할 거야.'라는 생각에 시작하기가 고민스러웠는데, 막상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찬 텃밭은 ‘안 먹어도 배부른 텃밭‘이 되어 매일매일 잊고 있던 나를 찾아주었다.

어느 주말 오후, 아빠와 산책을 하고 돌아온 아이가 '엄마 , 엄마가 좋아하는 걸 사 왔어' 라며 불닭소스라면 한 봉지를 건넸다. 식사 외 시간에 가족들의 눈을 피해 따로 끓여먹기가 힘든 한 끼 메뉴인 데다 의외로 짧은 유통기한을 가진 식료품이라 매번 사지 않고 지나치던 라면이었다. 건네주던 아이의 눈빛엔 이렇게 매운걸 왜 좋아하는지에 대한 호기심보다 엄마가 좋아하는 것을 구해왔다는 뿌듯함이 가득 담겨있었다. 나를 위해주는 누군가에게 좋은 느낌을 남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취향을 지켜내야할 이유가 충분해졌다. 그것이 소수의 의견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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