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잘 자라는 법

나는야 호스의 여인

by 해피쏨

#5. 잘 자라는 법





약속을 잡을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그날의 날씨다. 보통 주간단위로 날씨예보가 업데이트되는 바람에 먼 약속을 잡지 못하고 해당 주간에 짬을 내야 만날 수 있는 바쁜 사람이란 오해를 사곤 한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피하고 싶어 하는 날은 바로,

비 내리는 날


비 오는 날 입고 있던 청바지가 무거워지는 느낌이 싫다. 섬유조직 한 올 한 올의 냄새가 코로 들어오는 것 같은 그 찝찝함도. 평소엔 펌이 오래간다며 좋아했던 반곱슬의 머리카락도 이 날 만큼은 싫어진다. 예고 없이 번쩍거리는 하늘에 공중 부양하는 심장도 싫고, 우산을 접을 때 우산 끝에 매달렸다 떨어지는 굵은 방울을 맞을 때도 기분이 썩 좋지 않다. 공간을 벗어날 때마다 잊지 않고 우산을 챙겨야 하는 것 또한 칠칠맞은 내겐 너무 어려운 미션이다. 비 오는 날은 싫은 것 투성이인 날이자 나의 단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피하고 싶은 날이라 되도록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 애쓴다.


텃밭을 가꾸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해야 하는 일은 마당 텃밭에 나가 물을 주는 일이었다. 4평 텃밭에는 백조처럼 우아한 물 조리개보다 뱀처럼 똬리를 튼 씨 커먼 호스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내게 텃밭 물 주기는 나의 로망과 거리가 있는 모양 빠지는 일이었다. 팅팅 부은 눈으로 잠옷을 입고 나와 검은 호스를 휘적거리는 꼴을 누가 볼 새라 소방차의 호스처럼 재빠르게 물을 쏜 후 흙이 흥건해지면 얼른 집 안으로 들어왔다. 텃밭 물 주기는 이것저것 따질 것도 신경 써야 할 것도 없는, 빠르게 처리 가능한 일과 중 하나였다. 텃밭이 생기면서 비가 좋아졌다. 비가 싫었던 모든 이유를 상쇄할 만큼 비가 좋아진 이유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이 모양 빠지는 일을 처리해주었기 때문이다.







텃밭을 가꾸며 ‘#OO잘자라게하는법’은 나의 최다 검색어가 되었다, 비료 주는 법, 퇴비 주는 법, 진드기 퇴치방법 등등 수많은 방법론을 보며 농사일에 대한 존경심도 무럭무럭 자랐다. 자라나던 존경심에 의심의 눈초리가 서린 것은 텃밭에서 하는 일 중 가장 쉬웠던 ‘물 주기 방법’에 대한 이야기였다. 소개된 방법은 ‘비처럼 물 주기’ 였는데, 물 주는 법이 따로 있다니!? 땅이 촉촉해질 때까지 충분히 물을 뿌리면 되는 것 아닌가? 호스로 물을 준 후의 땅과 비가 내린 후의 땅은 똑같이 촉촉했다. 내리는 비는 양 조절 능력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주는 호스의 물이 더 적당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후로 나는 비가 올 때마다 축축한 집을 지키며 내리는 비를 바라보게 됐다. 높은 곳에서 곧게 떨어지는 비는 정확히 작물들의 이파리에 떨어졌다. 기껏해야 160cm인 사람의 가슴높이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이파리와 줄기, 심지어 땅을 파며 뿌리를 난데없이 때리던 호스의 물줄기와는 달랐다. 물이 흥건한 땅에 줄기가 누워있던 매일 아침이 지나고 비가 내린 후의 텃밭작물들은 빳빳하게 몸을 세웠다.

아하!? 이렇게!?

한 차례 비가 지나간 후,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검은색 호스를 풀고 호스 헤드를 분사형에 맞추었다. 수도를 튼 후 물이 3M의 호스를 지나는 동안 재빨리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조금 부족한 것 같아 까치발을 들었다. 긴 호스를 통과한 물이 헤드를 지나 뿜어져 나왔다. 위로 분사되어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한자리에 계속 내리지 않도록 호스를 천천히 좌 우로 흔들었다. 10분도 안 걸리던 텃밭 물 주기가 30분이 넘게 걸렸다. 호스로 비를 내리는 동안 나는 더 오래도록 텃밭을 바라보게 되었다. 쌈채소 구역, 열매 구역으로 나누었던 텃밭이 청상추,적겨자,치커리,고추, 오이로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비처럼 물주기 방법은 구석구석에서 자라고 있는 텃밭 채소들의 안부를 묻는 것까지였다.


이제부터 나는야 호스의 여신




호스를 빠져나오는 물이 비가 될 수 없겠지만, 오늘도 나는 까치발을 한 채 호스를 쥔 손을 번쩍 들고 텃밭으로 나간다.




잘 자라는 방법은 수 없이 많았지만, 그것은 내가 스스로 그러하길 선택할때 가능했다. 이 부자연스러운 몸짓이 누군가에겐 자연스러운 일이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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