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다짐
쪽파를 파종해야 하는 9월, 난관에 봉착했다. 9월 초부터 부지런히 다이소를 들락거렸지만 쪽파 씨앗을 구할 수 없었다. 종묘사에 들를 수도 있었지만 늘 동네 할아버지들이 모여 믹스커피를 기울이는 사이를 누가 봐도 제주 도민 본새가 안 나는 서울 여자가 비집고 들어가 씨앗을 구입하는 행위가 내키지 않았다. 신인류를 발견한 듯 쏟아지는 눈초리도 부담스럽고 혹시 내가 덤터기를 쓴 건 아닐까 의심하며 까탈스러운 서울 여자로 빙의해야 하는 피곤함도 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9월이 지나갔다. 따뜻한 남쪽에 사는 덕에 10월 중순까지는 파종이 가능했다. 이제 시간이 없다. 쪽파 씨앗 구하기 대작전이 펼쳐졌다. 어쩔 수 없이 마지막 보루로 남겨두었던 종묘사에 들르기로 했다. 종묘사에서도 쪽파 씨앗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곳에는 씨앗 대신 한 달쯤 자란 쪽파 모종이 모형처럼 진열되어있었다. 씨앗이 3알씩 심겨있던 모종 3개가 천 원이었는데, 대충 파김치만 해 먹는다 쳐도 이만 원어치의 모종을 사야 할 것 같았다. 모종을 심고 3개월을 매일 물을 줘야 하는 나의 노동력을 더하니 아무리 계산해도 손해다. 소식을 전해 들은 부산에 계시는 시어머니까지 쪽파 씨앗 구하기에 합류했다. 없는 거 빼고 다 있다는 부산의 깡통 국제시장 뒷골목에서 시어머니가 구해오신 쪽파 씨앗은 추석 택배대란으로 일주일간 박스 안 검은 봉지에서 싹을 틔운 채 제주 우리 집에 도착했다. 씨앗 구하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원. 씨앗이 생겼으니 올해는 심고,
이제 쪽파 너는 아웃이야!
요리조리 돌려봐도 내가 받은 쪽파 씨앗은 쪽파의 하얀 머리 부분이었다. 양파의 겉면처럼 수분기 하나 없이 바스락거리는 겉껍질 안에 촉촉하고 단단한 하얀 쪽파의 머리가 있는 것 같았다. 어라? 이거 분명히 어디선가 봤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한 여름 제주에서 건널목 삼각지대와 인도에 늘어져있어 몇 달 내내 사람들의 발길을 막아서는 그 씨앗이었다. 지나칠 때마다 아니 누가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에 이런 걸 말려둔 거지? 심지어 매해 널어두는 양이 많아지는 것 같아 사람이 걷는 길이 좁아진다고 생각했던 그 씨앗! 쪽파 씨앗 구하기 대작전에 성공한 후 나는 쪽파 탐구생활에 들어갔다. 쪽파처럼 흙속 뿌리에 영양분을 저장하는 구근식물의 번식과정은 이러했다.
9월엔 종묘사나 시장, 인터넷에서 말린 쪽파 종구(씨앗)를 구매한다. 알고 보니 이렇게 다양한 구매처가 있었다. 10월 중순까지는 쪽파 종구를 땅에 심는다. 일주일 이내로 흙을 뚫고 발아하는 성장이 빠른 작물인데 혹시 대가 올라오지 않는다면 종구에 해충이 있을 수 있으니 파내야 한다. 이후 50일이 지나면 수확을 할 수 있다. 9월에 심은 쪽파는 대게 12월의 김장철까지 먹을 수 있다. 먹고 싶은 만큼 먹은 후 한 고랑 정도 쪽파를 그대로 텃밭에 남겨두는데 내년에 파종할 종구에 양분이 쌓이도록 하는 과정이다. 대를 잘라먹고 뿌리만 땅속에 남겨도 되지만 잘린 대 사이로 균이 침투해 건강한 종구를 얻을 수 없으니 대를 함께 남기는 것이 좋다. 그렇게 추운 겨울을 지나고 남겨둔 쪽파의 대가 땅에 눕고 잎이 마르기 시작하는 5월이 되면 쪽파를 뽑는다. 겨우내 땅속에서 씨앗이 분열하여 심었던 한 개의 쪽파 씨앗에서 몇 배는 불어난 종구를 얻을 수 있다. 마른 잎을 잘라주고 뜨거운 여름의 태양에 하나씩 떼어 낸 종구를 바짝 말려준다. 마른 종구는 양파 망에 넣어 바람이 통하는 곳에 매달아 보관하고 또다시 9월이 오면 말린 쪽파 종구를 땅에 심는다.
하나를 심었는데 열 개로 불어나는 씨앗이라니, 아니 무슨 이런 자애로운 작물이 있단 말인가?!
이제부터 나의 목표는 쪽파 같은 사람이 되는 것. 이 추운 세상살이에서 나의 양분을 기꺼이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쪽파 씨앗 한 알을 보며 괜히 거창한 의지를 다지게 된다. 함께 할 쪽파 같은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본다. 쪽파 같은 사람을 찾습니다. 우선 저부터 돼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