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네스크 브로콜리

반복과 변이와 창발

by Mina

수많이 흩뿌려진 날들의 하루.

토요 장에서 로마네스크 브로콜리를 샀다.


서진이가 IB코스에서 사야 했던 수많은 책 중 유일하게 버리지 않은 책,

"Theroy of Knowlege(주 1)"

제목이 아주 마음에 드는 것을 보아, 아직도 나는 지식의 허영을 버리지 못하는 듯싶다.


벽난로 앞에 나란히 앉아서 딸과 각자의 일을 하던 중이었다.

예전에 내가 눈독 들였던 그 책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길래,

갑자기 하던 일을 멈추고 넘의 책을 보기 시작했다.

이론으로 빽빽할 줄 알았던 책 속에는 수많은 총천연색의 사진들이 실려있었고,

사진들에 붙여 놓은 질문과 생각해 볼 주제가 아주 흥미로웠다.

어느덧, 해야 할 세금신고의 의무는 잊고 정신을 놓고 그 책을 보던 중,

Fractal(주 2)을 설명하기 위한 사진으로 등장한 로마네스크 브로콜리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지만, 이곳에서는 자주 만났던 신비한 무늬의 브로콜리.

그 도도함과 질서 정연한 움직임이 만든 자태는 만만하게 먹힐 용도로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듯하여 구경만 하였지 감히 장바구니에 넣어보질 못했다.


책에서 fractal 모양의 이 브로콜리 사진에 매료된 다음날 장에 나가서 이 아이를 찾았다.

그 아름답고도, 신비한, 그리고 한참 바라보면 눈알이 뱅뱅 도는 모양을 들여다본다.

영원히 미분하고, 영원히 적분할 수 없는 물질세계에서

영원의 세계와 맞닿는 수학의 세계로 넘어가기만 한다면,

한없이 영원토록 작은 꽃송이를 뻗쳐나갈 것만 같은 이 물건을

눈이 뱅글뱅글 돌도록 한참을 들여다 보고 한참을 쪼개어 본다.


Fractal..... 네가 주는 메시지는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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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실대는 지적허영심을 증명하는 것은 책탐이다.

누가 읽어서 좋다는 책은 야무지게 목록추가하고, 한국에서 돌아올 때, 짐가방에 챙겨질 것이다.

지난번에 한국에서 올 때도 짐가방 가득 사다 나른 책들을 야심 차게 선반에 차곡히 꽂아두었는데, 이튿날 선반이 와장창 무너진 적도 있었다.

선반에 무겁게 책을 쌓는다고 가벼운 머리가 채워지겠냐? 하는 메시지로 다가왔다.

그래도, 때때로 고개를 들어서 선반(다시 세게 고정시킨) 위의 책들을 훑어보는 재미가 있다.

브로콜리를 맛있게 삶아 먹은 다음날, 선반을 유심히 살펴 펼친 책은 이일하 교수의 생물학 산책이다.


생물학이니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시작한다.

생물의 핵심요소를 짚어낸다.

복제와 변이가 그것이다.


"내 몸을 구성하는 화학원소들은 137억 년 전 빅뱅에 의해 우주가 만들어지면서 생성된 그 원소들이다. 이 원소들이 때론 물질 속에 갇혀 있기도 하고 때론 생명체 속에 들어가기도 하면서 돌고 돌아, 윤회한 뒤 오늘 현재의 내 몸속에 들어와 있다.(주 3)"


"물질이 생명이 되는 이 경이로운 현상에는 창발성이라는 물질세계의 흥미로운 특성이 깔려있다.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조직화되어 가는 과정에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특성이 나타나는 것이 창발성인데, 이 때문에 조직화가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면 물질에서 생명성이 돌연히 나타나게 된다. (주 3)"


우로 가던, 좌로 가던, 오로지 갈 곳은 한 곳이라는 것을 아는 듯,

한평생 돌고 돌아서도 목표하던 꼭짓점을 찍고야 만, 이 빳빳한 꽃송를 삶아 먹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브로콜리를 삶아주면, 왜 나무를 삶아주냐고 했다.

나도 그 표현에 동의하는 바가 있어 그저 달큼한 초고추장이라도 바르지 않으면 그다지 달갑지 않던 진초록의 브로콜리.

그 맛에 도도한 꽃송이기 쳐든 자존감의 빳빳함까지 예상한 로마네스크 브로콜리 맛은........

오!!!!!! 완전 반전이였다.


모양도, 색도, 맛도 창발 되었다.

연하고도 선하다.


복제와 변이, 그리고 윤회와 창발......


매일 반복되는 하루하루는 어제를 복제한 것 같지만, 오늘은 변이 하였고, 내일로 진화한다.

137억 년 전의 물질이 생명과 물질을 돌고 돌아 생명을 물질에 나르고, 물질로 생명을 윤회한다.

그렇게 원소가 단위분자로, 단위분자가 거대분자로, 거대분자가 세포로, 세포가 생명으로 창발 된다.


갑자기 이 도도한 꽃송이의 의미가 무섭게 다가온다.

아.... 뭐가 뭔지 혼돈스럽긴 한데..... 무서운 이 느낌은 무엇일까?

이 브로콜리는 메시지를 품고 온 것이 분명해 보인다.


"너는 너를 작고 하찮게 보지만,

너는 이미 완전체이고 전체이다.

무엇을 닮으려, 무엇이 되려 애쓰지 마라.

아무리 커져도, 아무리 작아져도 너는 너로서만 존재하면 된다."

안도감이 밀려온다.


그런데, 또 하나의 메시지가 다가온다.

사방으로 입체적이지만, 이 브로콜리는 평면적으로는 일정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등비수열처럼 일정한 크기를 증분 시키며 무한반복하듯 자신을 복제해 낸다.

줄곧 지 갈길을 향해 간다. 이 작은 꽃송이들은 지 갈길을 이미 아는 듯, 무심히 반복만 일삼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의심하지 마라. 반복만이 답이다."


신비롭고 입체적인 모양이 이제 신비로운 입술을 달싹이며 말한다.


"변이는 반복이 거듭되어야 이루어진다.

창발은 변이를 거듭하다 생겨난다.

결국, 반복은 창발을 낳는다.

그렇게 무가 유를 낳는다."


이렇게해서, 이책의 사진이 물었던 질문,

'이 기하학적 Fractal무늬가 세상에 준 지식이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의 답을 어느정도 푼 것으로 쳤지만, 사실 이 모양은 내 머리에 무한반복되는 여러 질문을 쏟아내고, 나는 지금도 답을 찾으려 용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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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Theor of Knowledge(지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Cambridge University Press

(주 2) 프랙탈(Fractal)은 일부 작은 조각이 전체와 비슷한 기하학적 형태를 말한다. 이런 특징을 자기유사성이라고 하며, 다시 말해 자기 유사성을 갖는 기하학적 구조를 프랙탈 구조라고 한다.

(주 3) 생물학산책, 이일하, 궁리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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