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인간이 다른 생물과 다른 점
아이들과 함께 동화책을 읽다보면, 내가 책으로부터 얻는 것이 더 많은 경우가 자주 있다. 물론 이것이 새로 얻은 것인지, 아니면 잊었던 것이 다시 꺼내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오카 슈조 님이 지은 ‘나는 입으로 걷는다(웅진주니어)’를 아이와 함께 읽었다. 주인공 다치바나가 산책겸 친구집에 놀러갔다 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다치바나가 걷는 방법이 특이하다. 태어날때부터 뼈가 약해서, 걷지 못하고, 침대를 개조한 이동수단(앞뒤에는 크기가 다른 바퀴가 달려있고, 침대 아래에는 다치바나가 필요한 물건들을 둘 수 있도록 개조한 다치바나 전용 이동수단이다.)으로 ‘입으로’ 걷는다.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기다리다, 사람이 지나가면 불러세워서, 그 사람이 가는 곳까지만 침대차를 밀러달라고 부탁해서, 이동한다. 그리고 이동하면서 그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니, ‘입으로 걷는’ 셈이다. 그 사람이 가는 곳까지만 침대차를 밀어주고 떠나면, 다시 지나가는 다름 사람에게 부탁해서, 움직이고…… 이러다보니 친구집에 가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 지는 알 수 없고, 누구와 이야기를 하며 걷게 될 지도 알 수 없는 하루 산책이다.
현대인의 생활 방식을 ‘유목민’이라고 많은 이들이 표현한다. 물리적 유목민이기도 하고, 디지털 유목민이기도 하고…… 차는 필수적인 생활 수단이 되었고, 많은 삶의 도구들은 모바일기기화 되거나 모바일기기와 연결되어있다. 이런 세상을 살기위해서, ‘이동권’은 삶을 위한 필수적인 권리이다.
최근 ‘장애인의 이동권’이 언론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장애인들 입장에서는 20년이 넘은 이야기이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사회의 과제이다. 그리고, 20여년동안 해결되지 않았다는 말은,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아마도 비장애인일 것이다.)이 장애인들의 이동권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알지 못하거나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이니, 해결을 위해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야하고, 이를 위해서, 다소 과격한(?)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은 아닌 지 생각해본다. 즉, ‘이동권을 가진 이들에게, 이동권이 없는 이들의 불편함을 겪어보도록 하여, 그들의 어려움에 공감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들이 최근 선택한 방법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사람은 현재 자기의 지식 범위에서 나와 다른 이들을 구분하는 것 같다. 현재의 비장애인은 현재 자신의 지식범위에서는 본인은 비장애인임으로, 장애인과 자신을 구분하고, 장애인들의 시급성, 중요성은 자신의 우선 순위에 넣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은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교통사고, 업무상 사고, 운동 중 사고, 일상 생활 중 사고 등, 많은 불의의 사고로 인해 후천적 장애인이 생기고 있다. 우리나라 장애인의 90%정도가 후천적 장애인이라는 통계가 나온 것은 벌써 20여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살면서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지식’ 범위에서 나와 다른 너를 구분하지 않고, ‘지혜’를 통해 ‘나도 언제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를 공감할 수 있다면, 나와 장애인은 ‘다름’이 없으며, 장애인의 시급성, 중요성은 나의 시급성, 중요성이 된다. 또한,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나도 도움을 받아야하는 위치가 될 수밖에 없다. 무엇도 영원하지 않으며, 현재의 나와 너의 관계는 언제든, 그리고 분명히 바뀌게 되어있다.
책에 어떤 할머니가 다치바나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신다. “다른 생물들은 약육강식, 그러니까 강한 것이 살아남지만 인간은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만들어 낸걸요. 전, 인류가 생각해 낸 가장 훌륭한 지혜가 바로 이거라고 생각해요.”
인간이 현재 인간의 사회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인류의 지식 덕분이 아니라 ‘인류가 생각해 낸 가장 훌륭한 지혜인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끝장 토론과는 다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지않았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