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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솔 Apr 17. 2022

공정한 경주란?

_ 토끼와 거북이

이솝우화 중, 토끼와 거북이는 누구나 알고 있는 우화이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아이들에게 전해질 이야기이다. 그런만큼 이 우화를 통해 전하려는 교훈도 명확하다고 우리는 생각하곤 한다. ‘천부적인 재능있더라도 게으름을 피면 질 수 있다’ 거나, ‘천부적인 재능이 없더라도,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이길 기회가 올 수 있다’라거나…… 그런데, 정말 아이들도 이렇게 받아들일까? 이렇게 교훈을 얻어야할까? 그리고 정말 이 교훈이 맞을까?


내가 아이에게 처음 이 이야기를 아이에게 들려주었을 때, 난 아이의 질문에 당황했었다. ‘왜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해?’ ‘토끼가 이기는 것이 당연한 달리기시합을 왜 거북이가 해?‘ 이런 식의 질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정말 정확한 질문이다.


우리는 공정을 이야기할 때, 그 시합 중 규칙의 공정, 혹은 결과에 대한 평가의 공정을 이야기하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그 시합자체의 공정, 그리고 준비과정의 공정은 무시하는 것 같다. 아니면, 누군가가 이를 무시하고 싶어하였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모두들 이것을 무시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거나.


산에 살며 항상 뛰어다니는 토끼와, 바다에 살면서 육지에서는 느릿느릿 기어다니도록 진화된 거북이가 달리기로 시합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공정하지 않다. 굳이 둘이 시합을 한다면, 달리기로 한 번, 수영으로 한 번 이렇게 두 번 시합을 했어야한다. 아니면, 아예 둘다 못 하는 ‘날기’를 가지고 시합을 하던가. ‘달리기’로 시합을 하기로 하고, 혹시나 토끼가 자면, 이길 수도 있으니, 그냥 열심히 하라며, 거북이가 시합을 참여하도록 하는 것 자체가 공정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하여도, 상대방이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경기라면, 그 경기 자체가 잘못된 경기가 아닐까?


개개인의 재능의 차이에 상관없이 무조건 참여해야하는 경기가 있는데, 이 경기를 공정하게 하고 싶다면, 어드벤티지(이익) 혹은 디스어드벤티지(불이익)를 규칙에 넣어야한다. 선천적으로 재능이 떨어지는 선수에게는 어드벤티지를 주고, 선천적으로 재능이 뛰어난 선수에게는 디스어드벤티지를 주어야 한다. 그래야, 선천적으로 재능이 떨어지는 선수도 본인의 힘과 노력으로 승리할 수 있고, 재능이 뛰어난 선수도 게으름피우지 않고 노력해야 이길 수 있다. (재능이 뛰어난 선수가 게으름을 펴서, 재능이 없는 선수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만약, 경기의 규칙에 어드벤티지나 디스어드벤티지를 넣기 싫다면, 다양한 경기를 만들고, 재능이 있는 사람끼리 경기를 하도록 하면 된다. 토끼는 토끼끼리 달리기 시합을 하고, 거북이는 거북이끼리 수영시합을 하면 된다. 그러면, 토끼들 중, 열심히 노력한 토끼는 달리기 챔피언이 될 것이고, 거북이들 중에서 열심히 노력한 거북이는 수영 챔피언이 될 것이다. 다양한 이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재능에 맞는 다양한 경기를 개발하면 된다. 여기서 공정은 무엇일까? 다양한 경기의 우승 상품에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일 것이다. 토끼에게도 1년치 충분한 식량을, 거북이에게도 1년치 충분한 식량을 상품으로 준다면,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토끼끼리는 혹은 거북이끼리는 어드벤티지와 디스어드벤티지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시합에 참가하는 토끼 중 한 마리가, 선천적으로 뒷다리 중, 하나가 짧아서 쩔둑거리며 뛴다면, 그 토끼에게는 어드벤티지를 주어야한다. 아니면 다리를 쩔뚝거리는 토끼들끼리의 시합을 별도로 만들거나. 물론 별도 시합을 만들었을 때, 우승 상품은 같아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합이외의 생활에서는 다리가 불편한 토끼나 다리가 모두 온전한 토끼 모두, 일상 생활에 불편하지 않은 사회가 되어야하고, 서로간의 차별이나 편가르기는 없어야, 토끼 사회를 공정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공정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 공정이 ‘재능의 차이’, ‘준비 과정의 차별’, ‘신체적 다름’, ‘성별의 다름’ 등은 무시한 체, 시합 자체 혹은 시합 중의 규칙 만을 이야기한다면. 또는 다양한 경기는 만들어 놨지만, 경기 간에 우승 상품의 차별이 심하다면. 우리 사회는 결코 공정한 사회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거북이에게 ‘달리기는 몸으로 하는 시합이니, 공정한 시합이야. 그러니 너도 참가해서 열심히 뛰어. 혹시나 토끼가 게으름을 피우면 이길 수도 있으니, 규칙도 공정해’,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난 공정한 사회를 살아오지는 못 했다. 그런 내가, 아이들에게 물려줄 사회는 공정한 사회일까?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너희는 거북이지만, 토끼가 게으름피우면 이길 수도 있으니, 무조건 열심히 달리기를 하라’고 하고 있은 것은 아닐런지. 더 슬픈 일은 이러한 나를 반성은 하지만, 반성한 후에 내가 해야할 일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희망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면, 세상은 속도은 늦을 지라도 바뀌어 나아갈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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