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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솔 Oct 03. 2024

10. 타인이면서 나 자신이기도 한

_ 아빠가 보는 딸, 아빠가 느끼는 딸

나에게는 두 딸아이가 있다.

첫째는 중1이어서, 한참 사춘기 티를 내고 있고, 둘째는 초4이어서 아직은 마냥 귀여움을 터뜨리고 있다.

두 아이가 최근(?)에 많이 하는 핑계 중 하나가 '아빠 닮아서 그래'라는 말이다. 내 아이들이고, 나와 아내가 키웠으니, 어떤 면을 나를 닮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행인 것은 '아빠 닮아서 그래'라는 말을 아직까지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아빠 닮아서 그래'라는 말을 들으면, '너희는 아빠를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칠 때가 있다.


나의 부모님 세대(적어도 나의 부모님)는 본인과 자식을 동일시하셨었다.

그래서, 본인의 모든 삶을 희생하면서, 본인의 목표는 '자식의 성공'이었다. 즉 '자식의 성공'과 '자신의 성공'은 같은 말로 받아들이셨었다. '자식이 공부를 잘하는 것'의 의미는 '내 자식은 현재 내 사회적 계급을 벗어나 한 단계 위 계급에서 살 수 있다'는 의미였고, 이러한 자식의 '계급 상승'은 '본인의 계급 상승'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이셨던 것 같다. 그래서, 말 그대로 뼈 빠지게 일하시면서, 모든 것을 '자식의 성공'을 위한 투자에 올인하실 수 있었다. 냉정하게 따지면, 자식에게 하는 투자는, 수익률을 예상할 수 없고, 투자가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는, 정말 도박 같은 투자일 수도 있다. 그래도, '나=자식'이라는 가치관이, 이런 투자를 가능하도록 했었다.


문제는 부모가 생각하는 '성공'과 자식이 생각하는 '성공'이 달라질 때, 발생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는 다른 것 같다.

성공의 의미는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경험을 반영한다. 그래서, 부모가 생각하는 '성공의 의미'는 부모가 살아온 삶을 반영한 결과물이고, 자식이 생각하는 성공의 의미는 자식이 살아온 삶을 반영한 결과물이다. 자식들은 부모의 아낌없는 투자 덕분에, 부모가 살아온 것과는 다른 삶을 영위하며 성장기를 보낼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어찌 보면 당연히 '성공의 의미'가 부모의 생각과 달라졌을 수 있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는 부모의 결정에 잘 따르던 자식들도, 머리가 크면서, 중요한 결정에서 '부모의 결정'과 다른 결정을 추구하는 일이 잦아지고, 부모는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자식의 결정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반복되면서, 서로에 대한 '서운함'과 '공감부족' 혹은 '이해불가'라는 벽이 쌓여온 것 같다. 그리고, 이 결과가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세대 간 갈등'이라는 현학적인 용어로 표현되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아빠인 이상, 두 딸아이가 정말로,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에서 잘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 바람은 , 불행하게도, 부모끼리의 경쟁으로 표현되는 것 같다. 동네에 빈공터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모여 놀았던 또래 놀이가 어느 순간부터 전문 강사의 지도에 의해 진행되는 학습이 되고, 그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아이는 또래 집단에서 놀기 힘들어지기도 한다. 집과 학교에서 하던 공부들 사이에 끼어든, '학원'은, 어느 순간부터 집과 학교를 뛰어넘은 존재가 되어, 아이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사교육이라 통칭되는 것들)을 완전히 지원하지 못하는 부모는, 부모 경쟁에서 밀린 부모가 되고, 그 부모의 아이들은 아직 세상의 출발선에 서지도 않았음에도, 경쟁에서 밀린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아이들은 오히려 점점 더 나이가 들어서야, 본인이 원하는 성공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점점 더 늦은 나이에 세상과 싸우기를 하는 것 같다. 어찌 생각하면, 사춘기에 함께 겪어야 할 과정인데, 사춘기는 초딩이나 중딩시절에 겪고, 다시 성인이 된 이후에, 본인이 원하는 성공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이제 중병에 걸리거나, 사고가 아니면, 백 살까지는 사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좀 더 시간을 주고, 기다릴 수도 있지 않을까? 아이들이 뚜렷한 목표가 없더라도, 크게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순간순간 본인들이 즐거운 일을 하며, 삶의 경험을 쌓도록 기다려주고, 그 삶의 경험을 통해, 본인에게 '성공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을 주며 기다리는 것은 불가능한 걸까? 이렇게 하면, 어쩌면 아이들은 사춘기를 고딩 혹은 대학생이 되어서야 겪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문제 될 것은 없지 않을까? 어차피 백 년을 살 아이들인데. 스무 살이 되어도, 겨우 인생의 20%를 지낸 것뿐인데.


내 아내가 가끔 나와 아이들이 자는 모습을 휴대폰으로 찍어서 보여줄 때가 있다.

신기하게도 정말 비슷한 모습으로 잔다. 글쎄, 유전과 환경으로 자는 모습이나 좋아하는 음식은 비슷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심으로 바라본다. 내 두 딸아이가 살아가는 세상은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이기를. 그리고 내 두 딸아이가 생각하는 성공의 의미는 나와 다른 의미이기를. 그리고 그 성공의 목적은 '자신의 행복'이기를.


얼마 전까지, 우리 둘째 아이에게 꿈을 물어보면, '좋은 엄마가 될 거야'라고 이야기했었다. 사실 나는 이 답변이 좋았다. 아이들이 지금 이 순간, 가족과 보내는 순간을 행복하게 느낀다는 의미인 것 같아서. 그런데 요즘 둘째에게 꿈을 물어보면, '작가가 될 거야'라고 이야기한다. 아마도 삶의 경험이 쌓이면서, 계속 계속, 꿈도, 성공의 의미도 바뀌어 가겠지. 그 과정을 보며, 난 진득하게 기다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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