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파리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모든 걸 뒤에 두고 성급히 떠나왔지만 혼자 살아가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나는 종종 우울한 마음으로 혼자 방에 처박혀 지내곤 했다. 혼자 외국에 나와서 사는 게 보이는 것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원하는 것들을 조금 더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게 된 만큼 감당해야 할 괴로움도 따라올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이치가 있었다. 이방인의 설움을 누구와 나누어야 할지도 모르겠었고, 괜한 자존심에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신들의 이야기만 쏟아내기에 바빴고 내가 보내는 필요의 눈길을 알아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점점 더 내 안에 갇혀버렸다.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처음으로 정말 누군가가 그리웠다. 괜히 평소에 하지도 않던 전화를 엄마한테 했다가 바타클랑 앞을 지나는 길거리에서 서럽게 울어버렸다. 별일 없냐고 묻는 목소리에 아무 일도 없는데, 정말 잘 지내는데 왜 이러지, 하면서 웃으면서 울었다. 엄마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고 기다려줬다. 괜히 민망해서 계속 훌쩍이며 웃었다.
어느 퇴근길에 혼자 영화관에 가서 그레타 거윅의 영화 <레이디 버드>를 봤다. 시얼샤 로넌이 맡은 주인공 크리스틴, 그러니까 레이디 버드는 엄마가 너무 싫고, 빨리 대학생이 되어 지금 살고 있는 작은 동네를 떠나 뉴욕으로 가고 싶어 하는, 평범하면서도 개성이 강한 고등학생이다. 그녀의 모습은 나의 고등학생 때를 생각하게 했다. 나는 그녀에 비하면 훨씬 덜 과격했고, 훨씬 덜 씩씩했지만, 그녀와 내가 결핍했던 것들과 바랐던 것들이 비슷해 보였다. 그녀는 뉴욕에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뉴욕으로 떠나 더 큰 세상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녀의 엄마는 그녀가 뉴욕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싫어하며 항상 그녀를 화나게 하는 대답을 한다. 그렇다고 그녀의 엄마가 그녀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 많이 사랑한다. 둘은 대화를 시작하기만 하면 싸우지만 결국 중요한 순간에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우리 모두의 모녀 관계와 같은 사이이다. 어느 순간 그녀는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는 나를 좋아해?" "당연히 너를 사랑하지." "근데 좋아하냐고. 그냥 지금 나의 모습을 좋아해 줄 순 없어?"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차이.
나의 부모는 나를 사랑했지만, 순간의 나를 좋아했을까. 그 순간의 내 모습에 만족했을까. 그것은 나의 학창 시절 내내 나를 괴롭히던 생각이기도 했다. 나는 아빠에게 내가 어떠한 장식품인 것 같다고 느꼈다.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해서 기쁜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칠 자신의 모습이 딸로 인해 더 좋아 보이길 바라고 있다고 느꼈다. 나 또한 레이디 버드처럼 고3 내내 서울에 대학을 가겠다고 저녁마다 아빠와 싸웠다. 아빠는 스카이가 아니면 서울에 보내주지 않겠다고 했고, 나는 어떤 대학이라도 서울에 가겠다고 우겼다.
레이디 버드가 그렇게 원하던 뉴욕으로 갔던 때, 부모의 진심을 깨달았을 때, 뉴욕의 길거리를 홀로 터덜터덜 걸을 때.
내가 그렇게 바라던 서울로 대학을 갔을 때, 첫 해를 방탕하게 보내고 외로움을 온몸으로 느꼈을 때, 엄마 아빠의 사랑의 방식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다시, 나는 그때를 다 잊은 것처럼, 한국을 떠나 파리에 가서 살겠다고 선언을 하고, 또 부모를 떠나고, 또다시 홀로 밤거리를 터덜터덜 걷는다. 정작 나는, 엄마 아빠를 좋아했을까.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파리의 밤거리를 멍하니 걷다가 우연히 달을 보았다. 아주 크고 환한 보름달이었다. 점심시간에 동생과 통화를 할 때, 전화기 너머 큰 소리로 말하던 아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오늘 대보름이니까 밤에 달 꼭 봐래이. 여전히 나는 아빠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았는지, 우연이 아니었다면 놓칠 뻔했던 그날의 보름달을. 흐릿해진 시야로 한참을 쳐다보았다.